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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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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역사

  1. 문화와 역사

문화재

유형문화재

부평향교(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
부평향교 사진
  • 위치 : 계양구 향교로 19 (계산동, 부평향교(지정문화재))
부평향교는 현재의 경인교육대학교에서 북쪽으로 약 2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인종 5년(1127)왕명에 따라 수주(樹州)향교가 계양구 오류동 산4번지에 세워졌는데 당시 전국 56주가 모두 이에 따라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수주의 후칭인 안남도호부가 의종 19년(1165) 계산동(온수골)으로 이전됨에 따라 당시 안남향교도 안남산 남쪽(현재 계산2동 한우리 아파트 부근)에 이전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 충선왕 2년(1310) 부평부가 되면서 부평향교로 고쳐 불러왔고 병자호란(1636)을 맞아 문묘 건물이 완전히 소실되었으나 조선 숙종14년(1688)에 현재의 위치에 문묘를 재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평향교에는 명륜당, 재실등 교육시설을 앞에 놓고 그 뒤에 대성전과 동·서무의 문묘시설을 둔 우리나라 향교의 전형적인「전당후묘」의 형식이다. 열성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대성전과 동·서무, 동·서재는 맞배지붕형식으로 되어 있고, 명륜당은 팔작지붕이다. 중국성현5성위와 한국18현을 모신 석전대제는 매년 음력 2월과 10월 초정일에 봉해하고 있다.
부평도호부청사(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2호)
부평도호부청사 사진
  • 위치 : (21049) 인천광역시 계양구 어사대로 20 (계산동, 인천부평초등학교)
원래의 도호부청사는 재북부2리(계산동 898번지)였으며 현재는 계산동 943번지 부평초등학교 내에 옛 청사건물이 변형은 되었으나 일부가 남아 있는데, 이곳에는 계산동은행나무(시지정기념물 11호), 욕은지(시지정 문화재자료 1호), 어사대(시지정문화재자료 제3호)의 흔적이 도호부청사 앞에 남아 있다.

부평도호부청사는 숙종 3년(1677)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세워진 내력을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고려시대 의종 4년(1150)에 안남도호부로 고종2년(1215)에 계양도호부로 조선시대 태종 13년(1413)에 부평부가 부평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모든 정황으로 볼 때 부평도호부로 승격이 되면서 청사 건립에 착수하여 약 5년후(태종 18년, 1418)에 완공된 것으로 보여진다. 청사옆에 보호되고 있으며 이때 풍치목으로 심어진 듯한 은행나무의 수령이 약 600여년쯤 되는 것과도 일치한다.

기록에 의하면 객사, 동·서헌, 삼문, 근민당, 좌·우익랑, 동·서책방, 사령청, 향청, 포도청, 훈무당, 부창등 여러 채의 건물로 당시에는 웅장한 규모였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내아만 남아 있고, 원래는 “ㄱ”자 건물이였으나 1968년 현 위치로 이동하면서 “ㅡ”자건물로 바뀌어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도리집이 되었다.

무형문화재

목조각장 이방호(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2호)
목조각장 이방호씨 사진
  • 주소 : (21015) 인천광역시 계양구 다남로143번길 33 (다남동)
석가모니불좌상 외 44점, 목조각 전수 등으로 불교전통조각을 계승발전시키고 전통문화 계승으로 계양구 문화발전 기여 함.

문화재자료

욕은지(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
욕은지 사진
  • 위치 : (21055)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어사대로 20
1983년 3월 2일 인천광역시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부평초등학교 교정 동쪽에 어사대(御射臺)와 함께 있다.
원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고종24년(1887)에 보수하여 현재의 곳으로 옮겼다. 욕은지는 돌을 쌓아 가로 18m, 세로 16m의 크기로 만든 연못으로, 가운데에 둘레 7m의 돌산을 만들어 풀과 나무를 심고, 다리를 만들어 남쪽과 연결하였다. 연못 동쪽에 쌓여진 돌 가운데에는, 고종 24년에 고쳐 지었다는 기록을 새긴 돌이 끼어 있다.

정조 21년(1797) 왕은 김포의 장릉을 참배하고, 부평을 경유하여 생부를 모신 수원 현륭원에 갔다고 전해진다.
이 때 부평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이 곳에서 활을 쏘고 손을 씻은 것으로 여겨진다.
어사대(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
어사대 사진
  • 위치 : (21055)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어사대로 20
욕은지 바로 옆에 돌로 대를 쌓고 중앙에 어사대광서정해중수(御射臺光緖丁亥重修)라고 새긴 장대석이 놓여있다. 예전에 정자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고종 24년(1887)에 증수하였다는 표지석만 남아있고 인조가 활을 쏘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욕은지와 더불어 기록에 의하면 인조보다는 부평에 왔던 분은 정조 한 분으로 효를 중요시하고 활쏘기를 즐겨했던 터라 정조 21년 (1797)김포 장능을 거쳐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지금의융릉)을 전배하기 위하여 부평을 지나갔는데 이때 점심 수라를 들고 휴식할 때 활을 쏜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 더욱 신빙성이 있다.

기념물

이찰, 이율 형제정려(인천광역시기념물 제52호)
이찰, 이율 형제정려 사진
  • 위치 : (21002) 인천광역시 계양구 갈현동 산73-6
세종대왕의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후손인 전주이씨 이찰과 이율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병환이 나자 곁을 떠나지 않으며, 백방으로 약을 구해 극진히 간호하였으나 차도가 없이 위독해지자 형제가 번갈아가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입에 넣어 드렸으나 끝내는 사망하여 묘막을 짓고 3년 간의 시묘를 살았는데, 이후 아버지께 못한 효도를 유감스럽게 생각하여 어머니를 더욱더 극진히 모셨는데 형제가 나이 40이 가까워오자 어머님 또한 노환으로 위독해지자 아버지께 하였던 대로 똑같이 행하였으나 보람없이 운명하자 애통해하며 장례를 치룬 후 다시 묘막을 짓고 3년 간의 시묘살이를 했다. 나라에서는 이를 알고 현종 11년 (1670년)에 벼슬과 함께 효자정려를 내렸다. 이찰 · 이율 형제의 효자정려는 두 분의 묘소가 있는 계양구 갈현동 산73-6번지에 있다.
영신군(永新君) 이이(李怡)묘(기념물 제 43호)
영신군(永新君) 이이(李怡)묘 사진
  • 위치 : (21045) 인천광역시 계양구 작전2동 산2번지
작전2동 산2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태종의 둘째아들인 효령대군의 의성군 손자이자 채(寀)의 여섯째 아들인 이이는 단종2년(1454)에 출생하여 왕족으로서 종실과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워 정의대부 영신군에 봉해졌으며 중종21년(1526) 73세로 사망하였다. 영신공원(永新公園)으로 조성된 묘역은 그 의 묘를 비롯한 가족묘 10여기가 위치하고 있으며 첫째 아들인 명원군(明原君)의 묘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에 따로 있고 둘째 아들인 함원군(咸原君)의 묘가 이곳에 있다. 함원군(咸原君)은 경학에 밝고 정직 청백하고 어전에서 치평지도(治平之道)를 건의하기도 하였는데, 그가 사망하자 명종(明宗)이 승지 홍대협을 통하여 술과 제문을 내리기도 하였으며 각묘의 묘갈과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조선시대 왕실 묘제와 시제 그리고 미술 공예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계산동은행나무(인천광역시기념물 제11호)
계산동은행나무 사진
  • 위치 : (21056)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어사대로 20
현재 부평초등학교 교정에 위치하고 있으며, 태종 18년(1418) 부평도호부청사 완공시 풍치목으로 심었던 것으로 보여지며, 수령은 약 580~600년, 높이 25m이다.
은행나무는 낙엽침염 교목으로 사찰이나 향교 뜰에 많이 심었으며 은행이란 이름은 열매가 겉으로 보기에는 살구같이 생겼으나 과육을 제거하면 은백색의 종자가 나온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잎은 두 갈래로 갈라지고 흡사 오리발과 비슷하다 하여 중국에서는 압각수(鴨脚樹) 라 부르고 있으며 열매는 식용,약용으로 쓰이고 목재는 귀중한 가구제로 사용한다.
계양산성(인천광역시기념물 제10호)
계양산성 사진
  • 위치 : (21042)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2동 산10-1 일원
인천의 진산인 계양산(해발 394.9m) 주봉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뻗어내린 230m지점인 계산동 산10번지 작은 봉우리에 위치해 있는데 계양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석성으로 축조양식은 퇴뫼식, 성벽은 내탁식이다.
고산성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성은 축조한지 1500여 년이 지난 현재 석벽이 모두 허물어지고 축성형태가 남아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의하면 석축 1,937척이나 퇴락되었다고 쓰여져 있으며 실측결과 산성의 총길이는 1,180m(계양산성지표조사보고서) 성곽의 외부는 잘 다듬어진 돌로 5m높이로 쌓아 올렸다.
동북으로 한강유역의 김포 평야와 남서로는 서해의 관문인 인천항, 수도 서울과의 연결교통 요충지인 이곳은 옛부터 군사적, 경제적 주요한 수로 교통의 요지로, 기본적인 지리적 여건이 외적방어와 북풍을 막을 수 있는 배산임수라는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어 군사상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산성이면서 불쑥 튀어나온 능선 중간부분을 중심으로 축조되어 성내가 사방으로 노출되는 특이한 성이다.
현재 산성의 복원을 위해 발굴 조사 중에 있으며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로는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선봉 묘역(인천광역시기념물 제53호)
이선봉 묘역 사진
  • 위치 : (21012) 인천광역시 계양구 동양동 588
이선봉은 전주 이씨 왕족으로 나라에 공이 있어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지고, 부인은 현부인에 올랐다. 당시 부평고을 동면(동양동)에서 살고 부인은 영월 엄씨였는데 이선봉의 아들인 이필혐은 동양동에서 출생하여 벼슬길에 올라 한성 판관을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이 강화도로 피난을 갔는데 청나라 군사가 강화도에 상륙하여 닥치는 대로 양민을 학살하자 현부인 엄씨는 적군에 잡혀 욕을 보이느니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그러자 그의 자부인 이필혐의 처 구씨도 어린 여자종의 치마폭에 유서를 써넣고 시어머니의 뒤를 따라 자결하고 말았다. 훗날 이들 고부에게 열녀의 정려가 내려졌는데 약 40여 년 전까지 열녀문이 보존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이 없으며 당산에 위치하고 있는 묘역에는 승헌대부 순평군지묘, 현부인 영월 엄씨 능선구씨의 묘가 있으며, 묘비는 갈색 대석에 갈색비로 높이는 1m 23cm이고 폭이 49cm이다. 능선구씨의 묘는 시체를 찾지 못하여 자결시 남은 신발과 유서를 쓴 치마폭을 묻은 것으로 전해진다.

비지정문화재

중심성지
중심성지 사진
  • 위치 : 407-050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산52-19
계양구와 서구의 경계를 이루는 징매이고개를 중심으로 하여 능선을 따라서 길게 쌓은 성을 중심성이라 하는데 조선 고종20년(1883)부평부사 박희방이 부민들을 동원하여 景明峴(일명 국영매방이 다하여 「징매이 고개」라고 함) 축조한 성곽이다. 해면방어선이 무너지고 이 고개만 넘으면 바로 70리 거리 한양에 도달할 수가 있어 이곳을 서해안 제2전선으로 중요시하고 유사시에 대비하고자 경명현 좌우에 성을 축조하려 하였으나 그 기금 염출이 여의치 못하여 고민하던 중 부평고을의 독지가가 금 60냥을 헌금하므로 이를 토대로 부민들이 동원되어 축조 1개월만에 완공되었다. 성곽은 토성에다 외부를 석축으로 하였는데 다행히도 계양산에 3~4개소의 유석층이 있어 돌을 뜨지않고 손쉽게 운반하여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다만 부민들이나 책임자인 박희방 부사역시 문관출신이라 성축조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터라 견고하지 못한 형식상의 성곽이 축조된 것이며 주민들의 뜻을 모아 축조한 것이라 하여 박희방부사가 중심성으로 작명한 것이다.
이 성은 군사목적으로 쌓았으나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사용된 적이 단 한번도 없고 견고하지 못해 10년도 못되서 무너져 내리고 자연 소실되는 등 방치되다가 1914년 헐어버려 지금은 흙과 소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성 길이 또한 500여m에서 최근 지표 조사시 실측된 1,000m 등 정확히 문헌에 기록된 바가 없다. 다만 초석만이 서구청에 관리되고 있고 당시 제작된 사적비의 원문해석을 보면 많은 이해가 되리라 생각한다.

< 사적비 원문 해석 >

계양산 서쪽에 고개가 있으니 이르되 경명이요 연해관문이다. 내가 이 고을에 원으로 와서 관문의 방어를 마음먹었으나 이루지 못하였었다. 이해 9월 그믐에 조칙이 있어 성을 쌓을 제 아전과 백성에게 관문을 막아야 고을이 편안한 점을 설명하였더니 백성들이 즐겁게 역사에 응하여 주어서 서쪽에 장대를 쌓고 병정훈련하는 곳을 삼았다.
문은 지명을 따서 경명이라 부르고 바다를 바라보며 방어토록 하게 하고 중심이라고 이름한 것은 무슨 뜻인고 하면 이것은 읍민의 마음으로써 성을 쌓은 즉 이것을 우리말로 여럿이 마음과 힘을 모아 성을 만들었다고 함이라. 고로 이름을 중심성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요. 때에 군기를 중수하고 모든 나주에 포사들로 굳게 지키는 방법으로 했다. 성을 다 쌓은 날에 고을 사람들이 이 업적을 글도 잘 쓰지 못하는 나더러 역사의 개요를 간략히 쓸 것을 청하므로 특히 읍 상·하동에서 60금을 연출하여 성 쌓는 자금을 마련한 것을 갸륵하게 여기며 이 글을 쓰노라.
광서 9년 계미10월 행부사 박희방 기록하고 쓰노라.

-주소 미기재
자오당지
자오당지 사진
  • 위치 :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산57-2
자오당이란 고려중기 계양도호부 부사의 관사에 백운거사 이규보가 붙인 이름으로 부평향교 북쪽 온수골 우편 언덕 위(계산동산 57-2, 현 배수지 부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이곳에서 다량의 와편이 출토되기도 했다. 동방의 시호라고 불릴만큼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문장가이며 지인인 재규보(1168-1241) 일찍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무인 정권시대인지라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다가 최충헌에 의해 발탁되어 출세가도를 달려 문화시랑평장사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고려 고종 16년 (1219)에 계양도호부부사로 좌천되었으며 자오당기에 의하면 심산(深山)옆의 갈대밭 사이에 퇴락하여 마치 깨진 달팽이 껍질같이 생긴 집을 태수의 거처라고 하였다. 그 형편을 살펴보니 겨우 대들보와 기둥만 세우고 억지로 집이라 해놓은 것이라, 머리를 들기가 불편하고 굽혀서 무릎을 펴기 힘드니 무더운 여름철엔 시루에 들어 낮아 한증이라도 하는 듯하다. 모든 가족이 살기를 꺼려하는 집이지만 홀로 집안을 깨끗이 치우고 기거하면서 그 집을 자오당이라 이름지었다. 이렇듯 산속에 아주 초라한 건물로 보여지고, 갈대밭 사이에 위치했다든지 달팽이 껍질로 표현한 것은 아마도 중앙내직에서 좌천된 마음을 은연중 표현한 것이지 결코 이 지역 부사의 관사가 외딴 숲속 갈대 밭 속의 보잘 것 없는 허술하고 사람살기를 꺼려할 정도의 오두막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봉일사지삼층석탑
봉일사지삼층석탑 사진
  • 위치 : (21041)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양산로75번길 7-13 (계산동)
경인여대와 백룡사 사이(계산동 산20번지)에 봉일사 터가 있다.
주춧돌이 남아 있을 당시엔 아담한 짜임새 있는 사찰임을 엿볼 수 있었는데 「만일사」나 「명월사」는 이규보의 시등에서 전해내려오고 있으나 봉일사에 대한 문헌은 찾을 길이 없다.
고려 말이나 조선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3층석탑이 봉일사 법당앞뜰에 홀로 서있던 것을 근처에 백용사가 세워지면서 백용사 경내로 옮겨졌는데 이 석탑은 인천지역의 유일하게 원 위치에 보존되어 있는 석탑이다.
이 탑은 현재 남아있는 모습이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5층탑으로 보아야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는 지대석과 1층 기단부가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나 1층 옥개석과 기단부가 크기에 비해 1층 옥개석이 너무 작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문화적 가치가 높으나 기단부와 1층 옥개석 2층옥신과 옥개석, 3층 옥개석만이 남아있고 훼손된 것을 1975년 화강석을 깎아 탑신부를 보완해 놓았다.
오조산
오조산 사진
  • 위치 : (21065) 인천광역시 계양구 오조산공원로 33 (용종동, 제1호근린공원)
풍수지리설은 우리나라의 전통적 지리과학으로 계양은 풍수상 북쪽의 계양산을 주산으로 고성산(古城山)의 동쪽능선과 중구봉(重九峰) 능선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고 망동산(望東山)을 안산(案山)으로 삼아 그 지형을 바탕으로 소도읍의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안산인 망동산의 산세가 미약하여 정기가 새어나가 지기가 약했고 인천만의 조수범람으로 벌판이 황량함은 물론이거니와 지형상 계산천(굴포천)이 부평중심부를 가로질러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형세로 동쪽이 허해서 결함이 있는 곳이다.
풍수의 원칙상 물이 흘러 들어오는 것은 길국이지만 흘러나가는 것이 보이는 것을 흉국이라 하여, 이곳의 주민들은 자진하여 여자는 머리에 이고, 남자는 지게로 흙을 날라 인공산을 축조하고 수풀을 심어 산을 가꾸게 되었다. 근처에 미륵당을 두어 지형의 공허를 보충했으나 오랜세월속에 5개의 봉우리가 흔적도 없어지게 된 것을 1998년 직경 30m, 높이6m 면적600㎡의 규모로 1개의 봉우리를 복원하므로 자칫 잊혀질 뻔했던 문화유산을 보존하게 됐다.
황어장터3.1만세운동기념관
황어장터3.1만세운동기념관 사진
  • 위치 : (21006) 인천 계양구 황어로126번길 9
황어장터만세운동
잉어의 산지라 기명하여 그 이름이 붙여진 황어장터는 5일장으로 조선시대부터 잡화 및 곡물뿐만 아니라 1일 200여 두의 거래가 이루어진 소시장으로 이름이 난 곳이다. 1910년대에는 더욱 확장되어 1일 소거래량이 500~600두에 이르렀으며 이용주민이 1,000명에 달하는 인천지역의 대표적인 시장이었다. 더욱이 이곳은 3.1운동 당시 장날을 이용하여 수백 명이 만세운동을 일으켜 인천지역에서 가장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되었으며 강서지방에서 최초의 만세운동로 전해지고 있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한민족은 국내외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거족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계양주민들도 3월 24일 오후 2시경 오류리의 심혁성의 주도하에 장기리 황어장터 장날을 이용하여 6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힘껏 외쳤다.
황어장터의 만세운동은 인천지역에서 전개된 가장 대규모적인 만세운동이었으므로 당황한 일제는 심혁성을 체포하는 한편 이의 진압에 적극 나섰다. 이에 장기리의 임성춘 등 주민 600여명은 만세운동과 더불어 체포되어 가는 심혁성의 탈환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부내 경찰관 주재소 일본순사는 칼을 빼어 휘둘러 선봉에 섰던 선주리의 이은선을 즉사케 하고 윤해영에게 부상을 입히는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이은선의 피살 소식이 전해지자 이담, 최성옥, 전원순, 이공우 등 천도교인, 기독교인, 일반 농민 등이 주축이 되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한편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자 하였다. 격분한 계양주민 100여명은 우선 선주지리에 있는 면사무소 서기 이경응이 친일적인 협의가 있다고 보아 그의 집으로 달려가 집을 부수어 민족정기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으며 주민들을 억압 탄압하던 면사무소를 파괴하여 친일기관을 응징하고자 하였다.
만세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계양주민 40여명은 3.1운동을 전개하였다는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며, 그 중 이담은 징역 2년, 임성춘은 징역 1년, 최성옥과 전원순은 각각 징역 10월, 심혁성은 징역 8월에 처해졌다. 당시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심혁성(오류동)은 1년여의 옥고를 치루고 논과 밭 그리고 집을 팔아 생필품을 장만하여 장터에서 빈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처자를 거느리고 산골로 은신, 전국 심산유곡을 30년 가까이 방랑하며 약초를 캐어 연명하면서 한편으로는 만주 등지를 내왕 애국지사들과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그 외에도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했던 33인의 일부 후손들이 아직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황어장터의 만세운동은 계양 주민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자긍심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천지역, 나아가 전국의 만세운동에도 견인차 역할을 전개한 역사적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