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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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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역사

  1. 문화와 역사

민속

사직제

부평사직단 터

계양(부평)에 사직단이 언제 세워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조선 태종 6년(1416)에 주현의 사직제가 실시되었으므로, 부평에도 이 시기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평의 사직단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헐렸으며, 사직단이 헐릴 때 그 속에서 남자의 성기처럼 생긴 목조물 몇 점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부평의 사직제는 음력 2월과 8월의 첫 무일(戊日)에 지냈으며, 100여 년 전까지 사직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부평향교에 보관되어 있다. 사직제를 음력 2월과 8월의 첫 무일에 지낸 것은 부평향교의 석전제를 음력 2월과 8월의 첫 정일(丁日)에 지내온 것과 흡사하다.

사직단이 없어진 후 계양산 남쪽 기슭에 당집을 짓고 매년 음력 10월 1일에 계양산신에게 동제를 지내왔는데, 계산지구도시개발 사업으로 이곳까지 모두 사라졌으나, 최근에 제사터를 옮겨 다시 제를 지내고 있다.

해동지도의 사직단 위치
해동지도의 사직단 위치

부평사직단의 위치는 『해동지도』에서는 향교 동쪽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 부평부 조에는 “부평의 사직단은 부 서쪽 2리에 있다.”라고 간단히 적고 있다. 계양산 서쪽 지선사 뒤 산림욕장에서 계양산을 오르다 보면 등산로 왼쪽에 1.5m 높이의 석축과 동서 9m, 남북 9m 정도의 터에 석축이 남아 있어 이곳을 부평사직단 터로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 등 다른 고지도에 표시되어있는 사직단 위치는 향교 뒤편 중구봉 밑에 있었던 것이 가장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

사직제 절차

사직제는 영신례(迎神禮), 전폐례(奠幣禮), 초헌례(初獻禮),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 음복례(飮福禮), 철변두(撤籩豆), 송신례(送神禮), 망료례(望燎禮) 순으로 거행한다.

제의는 각각의 제관들이 진행하는데, 제관의 역할을 살펴보면, 초헌관은 신관례를 하고 첫째 잔을 신위전에 올리는 제관으로 왕이나 정일품의 관리가 맡았다. 아헌관은 둘째 잔을 올리는 제관으로 왕세자나 정이품의 관리가 맡았다. 종헌관은 마지막 잔을 올리는 제관으로 영의정이나 종이품의 관리가 맡았다. 집례는 제례 진행 순서인 홀기를 읽는 제관을 말한다. 찬례는 초헌관(왕)을 인도하는 제관으로 예조판서가 맡는다. 천조관은 조를 올리는 제관이고, 봉조관은 조를 천조관에게 건네는 제관이다. 대축관은 축문을 읽는 제관이고, 우전관은 제상 오른쪽에서 술잔을 올리는 제관이고, 내봉관은 판문 안에서 외봉관의 잔을 건네받아 신실 안에서 헌관에게 잔을 전하는 제관이다. 외봉관은 준상에서 내봉관에게 잔을 건네주는 제관이고, 집준관은 준통에서 제주를 떠서 작에 따르는 제관이다. 찬의는 헌관과 집사를 인도하는 제관을 말한다.

부평도호부에서 진행한 사직제는 부평도호부 사직제 홀기(笏記)를 통해 그 절차를 확인할 수 있으며, 제의에 참여한 제관은 38명으로 아래 표와 같다.

<부평도호부 사직제 제관명 및 인원>

부평도호부 사직제 제관명 및 인원을 제관명, 태사, 후토, 태직, 후직, 계로 나누어 정리한 표
제관명 태사(太社) 후토(后土) 태직(太稷) 후직(后稷)
초헌관(初獻官) 1 1 1 1 4
아헌관(亞獻官) 1 1 1 1 4
종헌관(終獻官) 1 1 1 1 4
집례(執禮) 1 0 0 0 1
찬의(贊儀) 1 1 1 1 4
감제(監祭) 1 0 1 0 2
대축관(大祝官) 1 1 1 1 4
우전관(右奠官) 1 1 1 1 4
내봉관(內奉官) 1 1 1 1 4
외봉관(外奉官) 1 1 1 1 4
집준관(執罇官) 1 1 1 1 4
해설(解說) 1 0 0 0 1
38명
  • 사직제(국가문화유산포털) 사진1
    사직제(국가문화유산포털)
  • 사직제(국가문화유산포털) 사진2
    사직제(국가문화유산포털)
  • 사직제(국립고궁박물관) 사진
    사직제(국립고궁박물관)

향교 석전제

부평향교 석전 봉행

부평향교의 대성전에는 현재 공부자를 비롯한 오성위(五聖位 ; 孔夫子·顔子·曾子·子思子·孟子)·중국 송조 6현(周惇頤·程顥·邵雍·張載, 朱熹) 중 2현(程顥·朱熹)과 우리나라 현인 18위 등 모두 25위를 모시고 있다. 그러나 전국 234개의 향교는 설정에 따라 배사(配祀) 인물이 다르다.

대성전 내부(석전 중) 사진
대성전 내부(석전 중)

<부평향교대성전 선성선현 위패 봉안 위차도(位次圖)>

  • 宋朝 2賢

    • 徽國公 朱熹
      (휘국공 주희)
  • 韓國 18賢

    • 文昌候 崔致遠
      (문창후 최치원)
    • 文忠公 鄭夢周
      (문중공 정몽주)
    • 文獻公 鄭汝昌
      (문헌공 정여창)
    • 文元公 李彦迪
      (문원공 이언적)
    • 文正公 金麟厚
      (문정공 김인후)
    • 文簡公 成渾
      (문간공 성혼)
    • 文烈公 趙憲
      (문열공 조헌)
    • 文正公 宋時烈
      (문정공 송시열)
    • 文純公 朴世采
      (문순공 박세채)
  • 五聖

    • 大成至聖 文宣王
      (대성지성 문선왕)

      • 盛國宗聖公曾子(성국종성공증자)

        • 鄒國亞聖公孟子(추국아성공맹자)

      • 兗國復聖公顔子(연국복성공안자)

        • 沂國述聖公子思子(기국술성공자사자)

  • 宋朝 2賢

    • 豫國公 程顥
      (예국공 정호)
  • 韓國 18賢

    • 弘儒侯 薛聰
      (홍유후 설총)
    • 文成公 安珦
      (문성공 안향)
    • 文敬公 金宏弼
      (문경공 김굉필)
    • 文正公趙光祖
      (문정공 조광조)
    • 文純公 李滉
      (문순공 이황)
    • 文成公 李珥
      (문성공 이이)
    • 文元公 金長生
      (문원공 김장생)
    • 文敬公 金集
      (문경공 김집)
    • 文正公 宋浚吉
      (문정공 송준길)

부평향교에서는 공부자 기일인 양력 5월 11일에 춘기 석전을, 공부자 탄강일인 양력 9월 28일에 추기 석전을 각각 봉행하고 있다. 매년 춘추기 석전제가 봉행되는 부평향교는 부평에 세 번째로 세운 향교로 계양구 계산동 982-1번지에 있다. 경인교육대학교 정문에서 북쪽으로 약 200m 떨어져 있다. 본래는 고려 인종 5년(1127)에 부평의 진산인 계양산 밑에 건립되었다고 하나,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으로 당시 향교가 완전히 불타버리자, 그 후 숙종 14년(1688) 4월 8일에 지금의 자리에 새로 짓고 공촌동에 숨겨 두었던 위패들을 옮겨왔다.

부평향교 전경(계양구 제공) 사진
부평향교 전경(계양구 제공)

『신증동국여지승람』 학교 조의 “향교는 부에서 북쪽으로 2리에 있다(鄕校在府北二里).”는 내용은 인종 5년에 건립한 향교의 기록이다. 부평부의 북쪽에서 2리에 해당되는 곳은 계양산 기슭이다. 『부평부읍지』 학교 조의 향교는 “서쪽으로 2리 떨어져 있다(在府西二里).”는 내용이 지금의 향교 위치이다.

부평향교는 대성전(大成展) 10칸, 동·서무(東·西廡) 각 6칸, 명륜당(明倫堂) 10칸, 동·서재(東·西齋) 각 7칸 반, 전사청(典祀廳) 3칸, 공수고(公須庫) 10칸, 중문(中門) 3칸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전사청과 공수고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명륜당은 유학을 강의하고 배우는 학당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 건물이다. 홑처마의 팔작지붕으로 부연은 달지 않았다. 동·서재는 오늘날의 기숙사와 같은 곳으곳으로, 유생들은 이곳에 머물며 공부를 하였다. 동재는 양반 자제들이, 서재는 서류 자제들이 묵었다. 두 건물 모두 정면 5칸 측면 1칸 반 이었고, 지붕은 홑처마의 맞배지붕이다. 다만 평면 구성에 있어 서재는 좌우대칭이지만, 동재는 가운데 칸에는 대청마루를 두고 양 옆 칸은 온돌방을 두었다. 서재는 소실되었던 것을 1987년 복원하였다.

1941년 4월 인천부윤 나가이 데라오(永井照雄)는 같은 부내에 2개의 향교를 둘 필요가 없다며 강제로 인천향교(당시 부천향교)에 봉안된 위패를 소각하고 문서와 각 비품을 부평향교로 이관하였다. 광복 후 1946년 3월 부평향교와 인천향교가 분리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의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 지금도 옛 전례에 따라 매월 1일과 15일에 삭망례를 올리고, 매년 춘추 석전을 거행하고 있다. 1990년 11월 9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부평향교 석전제는 성균관유도회 부평지부와 성균관여성유도회 부평지부에서 주관한다. 석전제에는 집례, 헌관, 대축 등 제관 27명, 문묘제례악을 연주하는 41명의 악사, 육일무를 추는 64여 명을 포함 총 137명이 가량의 많은 인원이 필요했다고 한다. 지금은 그렇게 많은 인원이 참여하지 못한다. 2017년 부평향교 추기석전제에는 45명의 제관과 육일무 추는 일무원 16명이 제의를 진행했다. 문묘제례악은 녹음된 것을 활용했다. 제의에 참여하는 제관, 일무원 등은 전통의상을 재현한 복식을 그대로 입고 의식에 참여한다.

  • 부평향교 정문
    부평향교 정문
  • 대성전
    대성전
  • 제관
    제관
  • 일무원
    일무원

<헌관 및 집사의 명칭과 임무>

헌관 및 집사의 명칭과 임무를 명칭, 임무로 나누어 정리한 표
명칭 임무
초헌관(初獻官) 5성위에 향을 사르고 첫 잔을 올리는 제관
아헌관(亞獻官) 5성위에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제관
종헌관(終獻官) 5성위에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제관
분헌관(分獻官) 종향위(從享位)에 향을 사르고 잔을 올리는 제관
당상집례(堂上執禮) 홀기를 읽어 진행을 담당하는 제관
당하집례(堂下執禮) 원래는 동서무 진행을 담당하는 집례였으나,
지금은 동서무에 위패를 모시지 않아 대성전 월대 밑에 서서 해설을 담당한다.
전사관(典祀官) 제수를 준비하고 제상을 차리는 일을 맡은 제관
대축(大祝) 축문을 읽는 제관
알자(謁者) 초헌관을 안내하는 집사
찬인(贊引) 헌관과 대축을 안내하는 집사
봉향(奉香) 향을 받드는 집사
봉로(奉爐) 향로를 받드는 집사
봉작(奉爵) 준소에서 사준이 따른 술잔을 받아 헌관에게 건네주는 집사
전작(奠爵) 헌관에게서 술잔을 받아 신위 앞에 올리는 집사
사준(司樽) 준소에서 술을 잔에 따르는 집사

마을의례

마을의례란 마을 주민이 중심이 되어 마을의 무사평안과 풍요를 위해 자발적으로 계획하고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믿음체계이다. 동네 주민이 뜻을 모아 마을의 악귀, 악신을 물리쳐 주기를 바라고 가가호호(家家戶戶)의 평안, 생업, 건강 장수, 화목 등 마을과 주민의 모든 것을 위하여 마을의 조상신이나 수호신에게 빌었던 마을 공동체 신앙이다. 이 의식은 개인 차원이 아닌 마을 전체 제의로, 주민은 마을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마을의례라는 형식을 통해 단일화, 통합화한 생활공동체로 가꿔 나가려 하였다.

계양구에서도 여러 마을에서 마을의례를 거행하였다. 조사된 바로는 계산동에서는 도당제(산천제, 산신제), 다남동에서는 산신제, 동양동에서는 산고사(도당굿), 목상동에서는 산신제(산고사), 박촌동에서는 산고사(대동고사), 서운동에서는 산제, 용종동에서는 도당제, 효성동에서는 도당고사를 지냈다. 이렇듯 많은 마을에서 얼마 전까지 마을 주민이 모여 주민 중심의 마을의례를 거행했으나, 기독교의 전파와 마을 전체가 새로운 주거 지역으로 개발되고, 또 주민의 의식이 변화되며 참여가 줄어들어 하나 둘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 그럼에도 계산동과 효성동에서는 당집을 새로 마련하여 마을의례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계양산 산신제 알림 사진
계양산 산신제 알림

효성동 도당제 알림 사진
효성동 도당제 알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