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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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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역사

  1. 문화와 역사

역사

인천광역시 계양구

인천광역시

1994년 12월 20일 법률 제4789호로 개정된 지방차지법 중 개정법률 제2조 1항 및 2항에 의하여 직할시가 광역시로 승격하였고 제3조 2항의 ‘군(郡)은 광역시 또는 도의 관할구역 안에 두며’에 따라서 광역시 안에 군(郡)을 둘 수 있게 하였다.

1994년 12월 22일 법률 제4802호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등 9개 자치구 설치 및 특별시·광역시·도간 관할구역 변경 등에 관한 법률’은 당해지역에 있어서 주민생활의 편의를 증진하고 지역의 균형발전을 도모할 것을 목적으로 지방자치단체의 행정구역을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법률에 따라서 인천광역시의 관할 구역은 기존의 구역 외에 강화군과 화성군에 편입한 대부면을 제외한 옹진군의 전역 그리고 김포군의 검단면 전지역을 편입 받은 지역으로 하였다. 따라서 인천광역시의 면적은 339.1㎢에서 954.13㎢로 확대되어 전국 최대규모의 면적을 가진 광역시가 되었다.

계양구

994년 12월 22일 제정된 법률 제4802호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등 9개 자치구 설치 및 특별시·광역시·도간 관할구역변경 등에 관한 법률 제4조에 의하여 북구를 부평구로 하고 연수구와 계양구를 각각 설치하도록 하였으며 이 규정은 1995년 3월 1일부터 시행하게 되었다.

고려시대 고종 2년(1215)에 안남도호부가 되면서 처음으로 계양(桂陽)이란 행정단위의 읍호가 사용되게 되어 충렬왕 34년(1308) 길주목(吉州牧)으로 될때까지 93년간 사용되어 왔다.

부평부 지도 『여지도서(輿地圖書)』

1914년 4월 1일 부평군을 폐지하고 부천군을 신설하면서 면(面)을 통합할 때에 동면(東面), 당산면(堂山面), 황어면(黃魚面)을 통합하여 계양면이라고 하였다. 계양면은 1973년 김포군으로 편입하였다가 1989년에 인천직할시에 편입되면서 북구 계양동으로 되고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 계양구가 된 것이다.

1995년 3월 1일의 계양구청의 개청을 위하여 1995년 1월 1일자로 인천광역시 계양구 분구설치준비단의 단장으로 백세열(白世烈)이 임명되고 1월 4일에 설치준비단이 발족하여 임시청사의 신축과 공무원의 인력기구를 조직하는 등 3월 1일의 개청을 위하여 바쁜 행보를 내디뎠다.

3월 1일의 개청 때까지 임시청사의 신축이 동절기공사로 늦어지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차질 없이 개청이 완료 되었으며 백세열 단장이 초대 구청장으로 임명되었다. 공휴일인 3월 1일 11시에 취임식을 가졌는데 취임사에서 구청장은 계양구의 문화적 역사적 정체성을 개발하고 주인의식과 자긍심을 가지고 세계로 전진하자는 등 구정(區政)의 목표를 피력하였다.

임시청사는 계산동 905번지의 노동복지회관 주차장 대지2,890여㎡(890여평)에 총 공사비 11억4천5백여만원을 들여서 경량철골구조로 연면적 5,110여㎡(1,545여평)의 2층 규모의 가건물을 건축하였으며, 임시청사에서의 구정수행은 계산동 1079-1번지의 대지면적 23,566.60㎡, 연면적 35,277.68㎡(지하1층, 지상7층) 신청사를 건립 2001년 12월 1일 준공하게 되기까지 7년 10여개월이 되었다.

고대

선사시대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석부가 계산동에서 발견되기도 한바 있는 부평(富平)의 지명이 문헌상으로는 고구려시대에 주부토군(主部吐郡)이라고 한 것이 첫번째 고을 명칭이다. 신라 경덕왕이 장제(長堤)로 개명 하였다가 고려 초에 수주(樹州)로 고치고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 부평조에 의하면 백제 때에 부평을 주부토(主夫吐)라 불렀다고 적고 있다.

삼국시대의 부평지역은 3국의 각축이 진행되는 동안 그 성쇠에 따라 귀속을 달리하였다. 지리적 조건이 한반도의중심을 흐르는 한강에 인접한 관계로 3국의 한강유역 쟁탈전의 영향을 크게 받아 백제가 한강 유역을 지배할 때 (초기부터 근초고왕 이후)는 백제에 귀속하고,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유하고 있을 때(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이후)에는 고구려에 예속하고,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유할 때(진흥왕대 이후)에는 신라의 영토였다.

삼한시대

한강이남에서 기록상 최초로 등장하는 한(韓)족의 정치사회는 진국(辰國)이다. (위씨조선 B.C 2세기) 진국에 대하여 후한서에 기록하기는 한에는 3종이 있으며 첫째로 마한(馬韓) 둘째로 진한(辰韓) 셋째로 변한(弁韓) 이라고 하는데 무릇 78국으로서 땅을 합하여 사방이 4,000여 리이며 동서로 바다에 접하니 모두 옛진국이다라고 하여 삼한 전체가 진국의 땅이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때에 부평은 진한의 영역에 속하였음을 각 국 기록으로 짐작케하고 있다.

삼국시대

계양지역은 고구려 시대에 주부토라 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 장제군(長堤郡)으로 고쳐졌으며, 백제에 복수하라는 선왕인 광개토대왕(廣開土王)의 뜻을 받은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은 선왕의 영토확장정책을 계승하여 광대한 지역을 개척하였다. 장수왕은 96세의 장수를 누린 군주였는데 동왕 15년(427)에 왕도를 집안(集安)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기고 동왕 58년(470)에 옛 대방군의 영역인 김포반도에 주부토군을 설치하였다.

중세

송악(지금의 개성)지방의 호족 출신인 왕건(王建)은 818년 전제군주로 횡포를 일삼던 궁예를 추방하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곧 고려의 태조로, 935년에 신라를 귀속시키고, 태조19년(936) 후백제의 항복을 받음으로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이때부터 계양 부평지역은 고려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

수주(樹州)

고구려시대에 주부토군으로 불리던 명칭은 태조(太祖) 23년 (940)에 여러 주(州) 부(府) 현(縣)의 이름을 고쳤는데 이때에 수주(樹州)로 개명된 것으로 보인다.

안남도호부

수주는 고려 의종(醫宗) 4년(1150)에 안남도호부로 개칭, 따라서 부평의 읍토였던 수주의 존치연간은 10년이 되고 안남도호부의 속현은 금천현(시흥), 동성형(김포), 분진현(김포, 옹진), 공암현(김포 양주), 수안현(김포대곳)등 6개현되었다.

계양도호부

안남도후부 65년만인 고종 2년 (1215)에 계양도호부로 개칭되었다. 이때부터 부평은 계양이라 불리고 자연히 안남산이 계양산으로 불리게 된것이라 여겨지나 계양산에서 유래하여 계양이라 불려지었다는 설도 있다. 계양산은 계수나무와 회양목이 많이 자생한데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6.25사변 이후 많은 도굴꾼에 의해 도굴이 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으나 최근 계양구청에서 계수나무와 회양목을 수목하여 가꾸고 있다.

길주

충렬왕(忠烈王) 34년(1308) 계양도호부를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시켰다. 따라서 계양도호부는 93년간 존재하였으며, 매사냥을 좋아했던 충렬왕은 매방이 있는 계양을 자주 찾았고, 길주목으로의 승격과 계양도호부가 길주목으로 승격된 지 2년만에 충렬왕이 세상을 떠나자 부평부로 다시 강등된 것을 보아도 그것을 짐작케하고 있다.

부평부

충선왕(忠宣王) 2년(1310) 전국의 목사(牧使)고을을 폐지할때에 승격하고 강등시켰다 이것이 역사적으로나 사실적으로나 부평(富平)이란 지명이 생긴 시초이다.

황어현이 부평부로 흡수되고 양천현이 부평부에서 떨어져 나갔으며 인주는 다시 경원부로 독립하였다.

근세

고려가 조선으로 전환은 정치, 경제, 사회, 사상 등 모든 면에서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는데 중세에서 근세로의 전환으로 보는 이유로 이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지방제도는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에는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을 두었다.

부평부(富平府)의 변천

부평부는 고려말 이래 조선 건국 후에도 경기우도에 속해 있었는데 태조 4년(1395)에 일부 군현을 서해도로 독립을 시키고 나머지 군현을 좌·우도로 개편하여 양주, 철원, 연안 등의 군현과 함께 경기우도로 되었다.

부평부는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로 되고 다음해인 1414년 김포현을 부평도호부에 편입시켰다가 1416년에 다시 분리시키고 세종 20년(1438)에 부평의 관·민이 온천(溫泉)의 소재를 숨기고 나라에 보고하지 않아 일시적으로 현으로 강등된 지 8년만인 세종 28년 (1446)에 도호부로 승격하게 된다.

부평도호부는 이를 시작으로 연산군 11년(1505)에 부평도호부의 사람인 내시 김순손을 죄로 처형시키면서 부평도호부를 폐지하였다가 이듬해 중종원년(1506)에 다시 설치하고 장릉 방화죄인 최필성의 태생지라는 이유로 숙종 24년(1698)에 현으로 강등된지 10년만인 숙종 33년(1707)에 다시 복구되는 등 모두 3차례에 걸쳐서 강등되는 수난을 겪었다.

  • 해동지도의 부평부(18c) 이미지
  • 해동지도의 인천(18c) 이미지
  • 동여도의 인천(18c) 이미지

외세의 침략

7년간의 전쟁! 임진왜란

「대동지지」에 의하면 부평지방은 고려시대 우왕4년(1378)에 왜구의 침입을 받았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부평지방도 큰 피해를 보았는데 「쇄미록」에 의하면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이 의병 1,500명을 이끌고 안산에 주둔하였으며 병사 최원(崔遠)이 1,800여 명을 통솔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안을 느낀 병사들이 다수 강화도로 도망을 가고 남은 병사들도 도주할 마음만 갖고 있을 때, 노량진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은 한서 지방이 공백 상태임을 알고 부평, 계양을 포함한 한서 지방으로 침입해 왔다.

인천을 거쳐 부평과 김포를 점령한 왜군은 통진을 거쳐 계속 육상하였는데 이때 원군이 도착하여 전세는 반전되어 퇴각하던 왜군은 계양산 고성을 수리하고 주둔하면서 부근 고을들을 약탈하다가 서울에 주둔해있던 왜군이 퇴각하면서 함께 철수하게 되었다. 이때에 부평부청사와 부평향교가 함께 병화를 입어 소실하게 된 것이다.

조선과 청나라의 싸움 병자호란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은 지 불과 40년 만에 다시 10만대군을 거느린 청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인조(仁祖) 14년(1636)의 병자호란이다. 왕족과 일부 관리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가고 인조는 길이 막혀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서 항전을 시작하였다.

강화가 함락이 되고 왕자와 비빈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이 전하여지자 이에 조정에서는 주전(主戰)과 주화 (主和)의 양론이 분분하다가 결국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지금의 송파)에 나아가 항복을 하고 청의 강요에 따라 청 태종의송덕비를 세우니 이 비문은 인조 6년(1628) 부평부사에 재직을 하였고 한성판윤(漢城判尹)이었던 오준(吳竣)이 쓴 것으로 현재는 계산동에 위치한 부평초등학교내에 있다.

전통질서를 재정비하고 조선왕조의 집권체계를 강화하려는 대원군(大院君)의 개혁정치에 있어서 서양세력의 통상요구는 일단 저지해야 할 대상이었다. 더욱이 대원군의 집권 이전부터 프랑스 선교사가 국내에 잠입하여 선교활동을 하고 천주교 신자가 나날이 늘어나고 있었으며 또한 의주 동래 등지의 국경무역을 통해 서양 화물이 들어와 사용됨으로써 당시 조선에서는 이러한 서양세력의 침입에 대한 위기 의식이 고조되었다. 따라서 천주교를 금지 압박하고 양화의 유입을 엄금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여론에 힘입어 대원군은 통상거부의 쇄국정책(鎖國政策)을 고수하여 서양의 통상요구에 불응하고 양화금단을 명하여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단행하였다.

제국주의에 대항 병인양요

당시 조선에는 베르누(Berneu), 리델(Ridel) 등 12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었고 신도가 2만여 명에 달하고 있었다. 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해 관용적인 편이었으며 1860년 이후 두만강을 넘나들며 위협적인 대상이 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프랑스와의 연결을 계획함에 있어서 프랑스인 선교사를 이용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고 또한 유생과 양반들의 강력한 주장이 일어나 결국 천주교를 탄압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고종(高宗) 3년(1866) 1월에 천주교 탄압령을 내려 불과 몇 개월 동안에 9명의 프랑스 신부와 남종삼(南種三)등을 비롯한 8,00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죽였으니 이를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 한다. 같은 해 즉, 고종 3년(1866)에 프랑스의 함대가 인천의 앞 바다에 쳐들어온 사건이 있었으니 이를 병인양요(丙寅洋擾)라 한다.

프랑스의 전함 2척은 부평부 영해인 난지도 앞 바다에 정박을 하였고 다른 1척은 호도에 정박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연락 받은 당시 부평부사 조병로(趙秉老)는 즉시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에 병조에서는 부평부사 조병로 영종첨사 심영규(沈永奎)에게 명하여 프랑스 함정을 방문해서 엄중 문책하고 퇴거시키도록 하였으나 프랑스 측에서 승선을 거절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조정의 명을 받은 조병로는 그 후 좌수 이사격(李思格)과 중군 홍윤석(洪胤錫)을 대동하고 현장에 도착하여 산더미처럼 큰 프랑스 군함을 보고 놀랐다. 그들이 타고 갈 배를 찾으니 배는 있는데 뱃사공은 도망쳐 버리고 없었다. 근처에 있는 뱃사공을 동원하여 배를 타고 난지도 앞 바다에 정박하여 있는 프랑스 군함에 접근한 조병로는 죽을 각오를 하고 큰 소리로 함장과의 면회를 청하였다. 그러자 조선인 통역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사령관은 범섬 앞 바다에 정박한 군함에 있으니 그곳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프랑스 군함에 올라간 조병로 부사는 로즈(Rose) 제독에게 항의는 고사하고 겁을 먹고 하는 말이 “상부의 명으로 어쩔수 없어서 왔으니 제발 부평의 영역만이라도 벗어나 달라”고 애원을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 사령관은 부평부사의 요구에는 한마디의 대꾸도 없이 찾아주어서 고맙다고 하면서 통역을 앞세워 배안을 구경이나 하라고 하였다.

부사일행은 통역의 안내를 받아 군함 내부를 두루 보았는데 큰 대포, 진기한 군기와 물품, 시계 등을 보고는 감탄 하였다. 특히 유성기 소리를 듣고는 아주 신기하게 여겼다. 군함구경을 마친 부사 일행은 프랑스 사령관에게 부평 구역만이라도 떠나줄 것을 거듭 요청하였다. 이에 프랑스 사령관은 “우리는 때가 되면 간다”라고 하면서 “지금이 군함에는 쌀, 고기, 야채 등이 부족하니 그것을 주면 후사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부사 일행은 “그것은 상부의 명령 없이는 공급을 할 수가 없다”라고 하면서 거절을 하고 돌아왔다. 그 후 프랑스 함대는 양화진(楊花進) 서강(西江)까지 이르렀고 이로 인하여 서울 도성은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3척의 소함대로서는 도서의 공격이 곤람함을 깨닫고 그 부근의 지형만 정찰하고 돌아갔다. 로즈 제독은 그 해 10월에 7척의 군함을 이끌고 다시 인천 앞 바다에 있는 물치도 (勿淄島 : 작약도) 근처에 나타나 14일에는 갑곶에 상륙을 하고 16일에는 강화부를 점렴하고 구기, 양식, 서적 등을 약탈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경하(李景夏) 이기조(李基祖)이원희(李元熙) 등의 용장을 뽑아서 서울을 비롯하여 양화진, 통진, 광성진, 부평 등지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서울로 향하던 프랑스군의 일대를 한성근(韓聖根) 부대가 문수산성(文殊山城)에서 무찔렀고 양헌수(梁憲洙) 부대는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는데 성공 함으로써 결국 로즈 제독의 함대는 퇴각을 하였다. 이것이 즉, 부평 계양지역에서 (1866년) 병인양요의 개요이다.

근대

조선후기에 이르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커다란 변동으로 근대 사회를 지향하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경제적인 면에서는,

농업 생산력의 급증으로 사회 변동의 토대 마련

상공업은

상업자본의 성장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사회적인 면에서는

부의 축적에 따른 신분의 상승이 일반화되므로 양반사회의 신분구조가 붕괴되는 가운데 평민과 노비 해방, 유교적인 양반과 관료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사상체계로서 실학이 발생, 사회개혁과 근대화의 방향을 제시하기에 이르렀고 새로이 천주교가 전래되어 전통사회의 질서와 가치 규범에도 전하였으며 민족종교로서 동학이 일어나 농민층이 중심이 되어 현실개혁의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북학론자들이 통상개화론을 주장 개항과 개화의 기반을 마련하면서 개항이후 개화파에 의한 갑신정변, 그후의 갑오경장도 비록 외세의 개입이 있었다하더라도 내부적 기반은 실학이후의 자주적인 개혁의식에서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권력을 장악한 대원군은 많은 개혁을 단행하였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쇄국 정책이 진행되는 동안 은연중 명성왕후의 세력이 성장하여 반대원군세력을 규합, 결국 대원군은 고종 10년(1873) 국왕의 친전을 주장하며 하야한다. 대원군이 하야하자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개항을 강요하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고 조선 침략의 기초를 잡으려 하는 의도에서 1875년 운양호 사건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일본의 한국 침략의 효시이다.

계우정(桂虞亭)

고종3년(1866) 병인양요가 일어나니 나라에서 서해안 방비를 위해 긴급히 부평부·모월곶면 고잔리 과기길에 계우정을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부평연해를 수비하였는데 고종 16년(1879)까지 약 13년간 존속하다가 연희진 설치로 폐지되었다.

연희진(連喜鎭)의 설치와 중심성(衆心城)의 축조

조정에서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고 또한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일본 해군이 무력시위를 하는 가운데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문호를 개방하게 되면서 국방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특히 서해(西海)의 방비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즉, 부평과 인천 양안의 방비문제가 제기된 것은 고종(高宗) 14년(1877) 10월의 일이다. 당시 조정에서 부평과 인천을 해문요충(海門要衝)으로서 강화에 못지 않은 보장지중지 (保障之重地)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평과 인천은 보장지중이면서 인천로(仁川路)와 부평로 (富平路)가 강화를 경유하는 입경로(入京路)란 험로가 가로놓여 있는 강화로(江華路)를 취하지 아니하고 인천 부평으로 직행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고종은 “일본 선박이 인천으로 직행하는 것은 강화로 보다. 인천로가 편리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영의정 이최응(李最膺)은 “일본인들이 인천·부평로를 잘 알고 있는 이상 편리한 길을 버리고 험로를 경유할 리가 만무하므로 그들 선박이 인천·부평으로 직행할 것이 사소한 걱정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고종이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써 인천·부평 등지에 방비를 설치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고종 15년(1878) 8월 27일에 이르러 진을 설치하고 포대를 축조하는 것으로 구체화 되면서 인천부평 연안의 방비축조는 구진과 여러곳의 포대 축조로 완성되었다.

무위소(武衛所)의 준역(竣役) 상계(上啓)가 있자 고종은 인천에 신설된 진을 화도진(花島鎭)이라고 명명하고 부평에 신설된 진을 연희진(連喜鎭)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의 압력에 굴복함으로써 고종 17년(1880) 말에 인천의 개항을 허용함을 계기로 모처럼 축조된 방비책도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한편 고종 20년(1883) 1월 1일을 기하여 인천이 개항되자 인천항에 대한 방비책으로 이해 4월 7일에 영종진을 독진(獨鎭)으로 다시 설치하고 10월에는 부평에서 서곶(西串)으로 넘어가는 경명현(景明峴:징매이고개)에 중심성을 축조하였으며 고종 21년 1월 4일에는 부평 관내에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을 설치하였다.

중심성사적비(衆心城事蹟碑)에 의하면 중심성은 부평부사 박희방(朴熙房)이 조정의 명령에 따라서 주민들을 동원하여 축조하였으며 성문은 지명을 따라서 경명문(景明門)이라고 하였다. 문 위에 누각을 세워서 공해루 (控海樓)라고 하였으며 성의 이름은 ‘중민(衆民)의 마음을 모아서 축조된 성’이라고 하여서 중심성(衆心城)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서해안 연안방비를 위하여 화도진, 연희진 포대 중심성 등을 축조하였으나 단 한번도 그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국고의 손실과 백성들의 고역만 치른 결과로 끝났다.

부평군의 설치

개화당은 고종 21년(1884)에 그 일원인 홍여식이 총관으로 있는 우정국의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궁궐로 들어가서 왕과 왕비를 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옮기고 개화당을 따르는 50명의 사관생도와 200명의 일본군으로 호위케한 뒤 왕명으로 궁에 들어오는 민씨 일파의 대신들과 각 군영의 조사들을 살해하였는데 이를 갑신정변(甲申政變)이라고 한다. 정권을 장악한 개화당은 신정부를 조직하고 각국의 외교관들에게 통고하는 한편 국왕을 창덕궁으로 돌아오게 한 뒤 14개의 혁신정장을 마련 근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지만 청나라 군사의 출동으로 정변이 실패하였다.

이렇게 조선에서는 개화운동이 전개되었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등을 거치면서 근대 국가로 지향하였다. 부평·계양지역은 지방행정상 도호부로 그대로 유지하다가 고종 32년(1895)에 부평군으로 강등 되면서 인천관할부에 예속되었다. 제1차 갑오개혁(甲午改革)에서 별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은 제2차 갑오개혁 (甲午改革)에서 중앙정부의 기구 개혁과 아울러 지방제도에 대해서도 대 개혁을 단행 1413년이래 482년간이나 습용하여오던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구분하고 부(府), 목(牧), 현(縣)을 통폐합하여 그 명칭을 부(府) 군(郡)이라고 하였으니 군의 수는 337개에 이른다.

이때 부평부는 부평군이 되고 인천부에 감리를 두었다. 23부제는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5로 “지방제도개정” 으로 폐지되고 13부제가 시행되었다. 이때 부평군은 인천부에 속한지 1년만에 경기도의 소속군이 되었다. 1988년에 발간한 [부천시사]에 의하면 당시의 부평군은 총 15개면에 호구수가 3,021호로 인구는 남자6,213명 여자 4,981명으로 합계 11,194명이라고 되어있다.

일제강점시대

1910년 한일병합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을 침략하게 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나라의 주권이 강탈되었다. 1910년 9월 30일에는 조선총독부관저와 지방관저를 공존하고 시행함으로써 도의 관찰사를 도의 장관으로 개칭하고 도의 하부행정조직으로 부·군·면을 두었는데 13도 12부 317군 4322면이 확정되고 종전에 직할하에 있던 한성부와 경성부로 개칭되면서 부평부는 경기도 직할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부평군의 폐지와 부천군의 신설

조선총독부가 지방제도를 개혁할 때에 서해안의 관문인 인천에 개항장을 설치할 필요에 따라서 인천이 부(府)로 승격됨과 아울러 이 일대가 지역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즉, 1913년 12월 29일에 제정 공포된 부령 제111호 (1914년 10월 1일부터 시행)에 인천부의 관할구역은 개항장으로 축소를 하고 다른 지역은 전부 부평군에 통합을 하였다. 이 때에 부평군의 일원과 인천부에 편입되지 아니한 종래의 인천군의 나머지 지역 전부 그리고 강화군 중에서 일부 지역을 통합하여 부평에서 ‘부’자와 인천에서 ‘천’자를 떼내어 합성한 부천군을 신설하였다. 당시 부천군의 행정구역은 파주면을 비롯하여 15개 면에 148개 리였다.

3.1운동과 계양

1919년 3월 1일에 발발한 3.1만세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인천지역에서 가장 큰 시위운동이 일어난 곳은 계양이었다. 3월13일 이후 소래면(蘇萊面)과 계양면(桂陽面) 주민 수백명이 소래산에서 불을 놓고 만세를 불렀으며 읍내에서도 수백 명이 모여 시위를 한바 있었다.

1919년 당시 계양면민 가운데는 수십 가구의 천도교 신봉자가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천도교주인 손병희 (孫秉熙)선생과 늘 연락이 되었으며 감화를 받고 있었는데 이들이 손병희 선생 일파와 연계하여 3.1독립만세 운동을 거사하기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는 사실의 전모가 주민과 주민의 입으로 전하여지기 시작한 것은 3월 중순경부터였다. 이들의 활동영역은 부내(富內:부평) 계양 서곶과 함께 김포 지구등이었다. 이들은 만세 운동을 일으킬 오래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사발통문을 작성하여 각 지구별로 배부하는일, 태극기를 제작, 플래카드를 작성하는 일 등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만세운동을 황어장(黃魚場) 날인 3월 24일로 하고 시간은 장이 파하는 2시경으로 하며 주민들은 장에 나오는 것처럼 하면서 황어장터에 모이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들 대표들은 계양면사무소를 방문하여 면장과 면서기가 만세운동에 동조할 것도 당부하였다. 그러나 면장등은 공무원임을 상기시키면서 협조는 하되 행동은 하지않으며 묵인하는 정도로 양자가 합의를 보았다.

3월 24일 하오 2시경에 수백 명의 민중이 태극기를 나누어 받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기를 들고 앞에 나온 선도자 심혁성(沈爀誠)의 선창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절규하다시피 한 민중은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이 가두시위는 상당시간 진행되었다. 가두시위중인 오후 4시경에 선도자 심혁성은 경찰에 체포 되었다. 경찰에 체포된 심혁성을 탈취하려고 민중들은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다. 이 시위군중과 경찰이 충돌하여 경찰의 칼에 찔려서 죽은 청년도 있고 부상을 당한 청년도 있었다. 이 만세운동으로 해서 경찰에 검거되어 수감된 사람만도 30명에 달하였다. 그러니 이 장날의 만세운동의 규모가 어떠했는지는 짐작할 만하다. 가히 인천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시위라고 할 만하다. 이 때의 이의 담당 경찰은 부내주재소(富內駐在所:계산동)였다.

현대

정부수립과 계양

일본이 패망하자 한반도는 치안의 공백상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부평도 같은 상태에 놓이게 되자 이 치안상태의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8월16일 부평에서는 학생치안대와 일반치안대 그리고 채병덕(蔡秉德)의 치안대를 조직 하였다. 치안대는 부평공회당(옛 부평구청 2층)에 사무실을 두게 된다. 학생치안대(중학생과 전문학교학생으로 구성)는 즉시 부평경찰서와 각 파출소에 배치되어 곧 임무를 수행하였다. 학생치안대는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주둔하여 군정을 실시할 때까지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이 기간중에 부평에서는 절도나 강도 그리고 화재 등 불상사가 없었다. 학생들 힘이 있어서이기보다는 전적으로 주민이 협조하였기 때문이며 이런 것을 가리켜서 문화 민족이라고 한다. 미군은 38선 이남에 진주하고 소련군은 38선 이북에 진주하여 각각 군정을 실시하였고, 그런데 38선은 누가 언제 무슨 목적으로 확정하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장차 규명되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1945년 9월 7일에 상륙 진주한 미군에 의하여 군정이 시행되었는데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9월 11일 군정장관에 아놀드를 임명하고 인천의 군정관에 스틸맨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인천시장에는 임홍재(任鴻宰), 부평지구장에 김석기(金碩基), 서곶지구장에 김원용(金元容)이 임명되었다.

10월 16일 인천의 정회장연합회의(町會長聯合會議:지금의 동장연합회의)에서 임홍재를 시장으로 선출하였다. 1945년 11월 1일 부평·남동·서곶·문학출장소를 각각 지청으로 명칭을 바꾸고 1946년 1월 1일 정(町)의 명칭을 동(洞)으로 바꿨으며 6월25일 새벽4시에 남침을 시작한 북한 공산군은 6월 28일 서울을 점령당하고 7월 3일에는 인천을 점령하면서 계속 남하하였다. 그리하여 끝내는 낙동강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북한군에 점령하고 미처 피난을 못한 양민들은 모진 학대를 받거나 당하기도 하고 일부는 공산군에 협력을 하기도 하였으며 유엔 안전 보장이사회의 결의에 의하여 유엔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유엔군이 한국전에 참전하면서 전세는 한국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어가고 그것은 저 유명한 9월 15일의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의 감행이 성공하면서부터 유엔군은 그 여세를 몰아 9월 17일에는 김포비행장을 탈환하고 28일에는 수도 서울을 수복 하였다.

인천과 부평이 수복되고 남하하였던 군과 경찰이 돌아와서 치안과 행정업무를 수행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부평공회당(옛 부평구청 2층)에서 뜻 있는 인사들이 모였다. 당시 모임의 분위기는 몹시 흥분 되었고 차갑게 가라앉은 상황이라고나 할까 긴장된 상태 그것이었다. 치안대장에 이재준(李載濬:전 대림산업 회장) 행정책임자에 윤주환(尹柱煥)을 선출하고 각 동의 치안책임과 동 행정을 담당할 사람을 선출하였다.

구제(區制)실시

195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사회가 안정되고 인구도 급증하여 갔다. 1956년 11월 23일자 인천시 조례 제144호로 ‘인천시 출장소 설치 조례’를 개정하여 내무부의 승인을 받아서 1957년 1월 1일에 시행하였다. 이에 따르면 종전에 있었던 부평 서곶·남동 문학 주안 등 5개 출장소에다가 중부 남부 동부 북부 등 4개 출장소를 추가하여 9개 출장소를 설치토록 하였으며 그리고 인천시 규칙 제53호로 출장소 직제를 제정하여 지방참사(地方參事 또는 지방주사(地方主事)로서 소장과 부소장을 임명하도록 하였다.

인천시는 인구의 증가와 시 기구의 확대, 시 의회의 구성, 시 구역의 확장, 도시계획 등 발전적 변화를 거듭하다가 1967년에 이르러서는 시 행정기구의 확대 개편을 위하여 구제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즉, 1967년 3월 30일 법률 제1919호로 ‘인천시 구제’ 실시에 대한 법률이 공포되었으며 시행은 1968년 1월 1일부터였다. 이에 따라서 인천시의 모든 출장소는 폐지되고 중구, 남구, 동구, 북구 등 4개의 구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1967년 12월 29일의 인천시 규칙 제24호로 ‘ 구 출장소 직제’를 제정 공포하여 남구와 북구에 각각 1개씩의 구 출장소를 설치토록 하였으니 그것이 남구의 남동출장소와 북구의 서곶출장소 등인 것이다. 부평지역에는 북구가 설치되었는데 과거의 부내면(富內面)과 서곶면(西串面)의 지역으로 법정동(法定洞)이 29개동, 행정동(行政洞)이 19개동으로 면적은 81.61㎢이었고 인구는 구 설치당시의 기준으로 20,475명이었다. 구제실시와 동시에 십정동(十井洞)이 북구에 편입되었다.

1914년 4월 1일에 독립된 행정단위로서의 부평군(富平郡)은 해체되고 과거의 인천부(仁川附)의 구읍면(臼邑面), 서면(西面), 남촌면(南村面), 조동면(鳥洞面), 신현면(新峴面), 전반면(田反面), 황등천면(黃等川面), 영종면 (永宗面), 용유면(龍遊面), 덕적면(德積面), 다소면(多所面)등 12개 면중에서 인천부에 속하지 아니한 지역과 그리고 강화군 중에서 신도(信島), 시도(矢島), 모도(茅島), 장봉도(長峰島)와 남양군(南陽郡)의 대부면(大阜面), 영흥면(靈興面), 부평군(富平郡)을 통합하여 부평군의 ‘부(富)' 자와 인천(仁川)의 '천(川)'자를 따서 부천군 (富川郡)을 신설한 것이다. 1936년 9월 26일 부령 제93호로 ‘부·군(府·郡)의 명칭 위치 관할 구역 개정’을 공포, 같은 해 10월 1일 실시한 것에 의하면 부천군 문학면의 학익리, 옥련리, 관교리의 일부와 승기리의 일부, 다주면의 도화리, 용정리, 사충리, 장의리, 간석리의 일부가 인천부에 편입되었다. 이것이 제1차 인천부역(府域) 확장이다.

1940년 4월 1일 부령 제40호와 경기도령 제5호에 의하여 당시 부천군 관할 구역이었던 옛 부평군의 부내(富內) 서곶(西串) 지역이 문학 남동지역과 함께 인천부에 편입되었다. 이것이 제2차 인천부역확장이다. 부평이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독립된 행정단위로서의 면모는 사라지고 인천의 일부지역으로 속하게 되는 계기가 된것이다.

1968년 1월 1일 시행된 ‘인천시구(區)설치에관한법률’에 의하여 행정단위로서 과거의 부평지역의 일부나마 독립된 행정단위로서 ‘북구’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즉 부내면(富內面) 지역과 서곶면(西串面) 지역이 북구가 된 것이다. 1973년 7월 1일 법률 제2597호에 의하여 소사읍(素砂邑)이 발전적으로 부천시(富川市)로 개칭되면서 계양면(桂陽面) 과 오정면(吾丁面)은 김포군(金浦郡)에 편입되었다. 197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781호에 의하여 김포군 오정면이 부천시에 편입되었다.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1호에 의하여 김포군 계양면이 인천시에 편입하여 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평군의 부내면은 일부가 부평구(富平區)로 독립을 하고 부내면의 일부와 계양면이 통합하여 계양구 (桂陽區)가 되었고 서곶면이 김포군의 검단면(黔丹面)과 통합하여 서구(西區)가 되었으며 소사(素砂)와 오정(吾丁)이 통합하여 부천시(富川市)를 구성하였다. 즉, 과거의 부평군은 현재 인천광역시의 계양구 부평구 서구와 부천시로 분리가 되었다. 이 모든 과거의 부평부(군)의 구역이 단일체로서의 행정단위로 명칭이 존재할 날을 기대해 본다.

인천직할시

광복 이전에 인천의 인구는 20만명 미만이었다. 인천의 인구가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50만명을 상회 하면서 1968년에 구제(區制)를 실시되게 된 것이다. 1968년 12월 21일에는 우리 나라 교통 발달사에 새로운 획을 그을 사건인 경인고속도로의 개통을 보았다. 그리고 경제성장의 속도가 괄목할 정도였고 수출도 호조를 이루었다. 국민의 생활은 향상되고 인천의 인구는 나날이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다. 1968년 인구 50만명이 1980년에 100만명을 돌파하게 된 것이다. 1981년 4월 13일에 법률 제3424호로 인천시는 대구시와 함께 직할시로 승격되어 1981년 7월 1일부터 시행을 보게 되었다.

인천직할시의 행정기구는 대폭 개편이 되었다. 1981년 7월 1일 인천직할시 규칙 제734호와 인천직할시 담당관 및 실과직제(室課職制) 제735호로 개편된 인천직할시의 행정기구는 3실(室) 7국(局) 1본부(本部) 5담당관 (擔當官) 33과(課) 98계(係)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후 몇 차례의 개편작업을 거쳐 1982년 2월 24일 인천직할시 규칙 제826호로 개정한 인천직할시 직제에 의하면 본청은 2실 8국 1본부 4담당관 34과 98계로 구성되었고 구(區) 출장소(出張所)는 4구 2출장소에 31과 107계 79동(洞)을 두고 21개의 사업소에는 2과 37계를 두게 되었다.

직할시로 승격한 인천은 경기도의 관할을 벗어나서 즉, 경기도의 감독 하에 있지 아니하고 직접 중앙 정부의 직할 하에 있게 된 것이다. 인천직할시는 행정의 이원화(二元化)에서 오는 불편을 덜게 되고 행정의 신속화와 독자적인 도시개발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도시발전의 속도가 가속화되고 활성화되게 되었으며, 독자적인 세수(稅收)와 예산편성 및 집행이 가능하여져서 연간 200억 원의 세입이 증대하게 되어 도시개발이 더욱 촉진되게 되었다.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함에 따라서 인천직할시 교육위원회가 설치되게 되었다. 교육 위원회에는 교육감을 두고 학무국과 관리국 밑에 초등교육과 중등교육과 실업교육과 사회교육과 관리과 시설과 재무과 서무과 기획감사과를 두고 인천직할시내의 공사립 초·중·고등학교의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인천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서 1988년 1월 1일에는 대통령령 제12367호에 의하여 북구의 서곶 출장소와 남구의 남동출장소가 폐지되고 북구에서 서구가 분구되고 남구에서 남동구가 분구가 되었다. 서구의 관할구역은 백석, 시천, 검암, 경서, 연희, 공촌, 심곡, 가정, 신현, 석남, 원창, 가좌동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