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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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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역사

  1. 문화와 역사

인물

고려시대

명관

공 유(孔 愉)
공 유는 고려 원종 때 무신으로 원종 11년(1270) 삼별초난으로 당시 나주가 7일간이나 공격을 받았는데 장군으로서 이를 막지 못했다는 추밀부사를 지낸 김방경의 탄핵으로 인하여 면직된 바 있었으나 원종 13년 (1272) 계양도호부사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재임 중 다시 삼별초의 습격을 받게 되어 격렬히 저항 하였으나 처자와 함께 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 일은 과거 공 유에 의해 삼별초가 피해를 당한 보복공격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부평고을 연해에 배를대고 곡식, 가축(소, 돼지)등 닥치는 대로 약탈이 극심하니 공유부사가 이를 결사적으로 저지하였으나 패하여 결국 포로가 되었다. 공 유는 삼별초에 끌려가서 1년간이나 모진 고초를 겪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하게 되었고 원종은 공 유의 공훈을 치하했고 충렬왕 때 대장군이 되고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충렬왕 13년(1287)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염세충(廉世忠)
염세충은 원종 10년(1269) 계양도호부사(桂陽都護府使)로 부임하였고 동12년(1271)에 해임되었는데 기록이 없어 치적은 미상이다.
이규보(李奎報)
고려 고종 때 문신으로 자는 춘경(春卿)이고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또는 지헌(止軒) 그리고 술, 거문고, 시를 즐겨 삼혹호 선생(三酷好 先生)이라 했다. 명종 20년(1190)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목사록 겸 장서기 (全州牧司祿兼掌書記) 병마록사 겸 수제(兵馬錄事兼修製)를 거쳐 희종 3년(1207)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되었다. 고종 6년(1219) 좌사간(左司諫) 벼슬에 있을 때 지방관의 죄를 묵인해 줬다는 혐의로 계양도호부사(桂陽都護副使)로 좌천되었다가 그 이듬해 중앙관직인 경직(京職)으로 승진되었다. 계양부사 재임 13개월에 수많은 시문(詩文)을 남기어 훗날 『동국여지승람』과 『부평읍지』의 기틀이 되고 또 부평고사연구에 큰 자료가 되고 있다. 고종17년(1230)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 경성부우첨사지제고(判·書省事 寶文閣學士 慶成府右詹事 知制誥)에 올랐고 그 이듬해 지문하성사 호부상서 집현전대학사 판예부사(知文下省事 戶部尙書 集賢殿大學士 判禮部事)가 되고 고종 24년(1237) 금자광록대부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태보(金紫光祿大夫 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禮部事 翰林院事 太子太保)로 퇴관했다. 호탕 활달한 시풍으로 당대를 풍미한 걸출의 시호(詩豪)였다. 벼슬이 바뀌어 부임할 때마다 그 감상을 읊은 즉흥시로 유명했다. 처음에는 도연명 (陶淵明)의 영향을 받았으나 자기 개성을 살려 독자적인 시격(詩格)을 이룩했고 몽고군의 침입을 진정표 (陳情表)로서 격퇴한 명문장가로 시호는 문순공(文順公)이다.
이실충(李實忠)
의종 24년(1170) 안남도호부 태수로 재임할 때 전임부사 허홍재가 세운 척서정 축대 위에 정자 한 칸을 세우고 초가지붕을 덮어 이를 초정(草亭)이라고 했다.
이희목(李希穆)
이희목은 신라말 부평지방의 호족(豪族)으로 부평 이씨의 시조이다. 고려가 건국하자 태조 왕건은 부평고을에 와서 주권을 잡고 고을을 다스리고 있는 이희목을 달래 높은 벼슬을 내려 부평고을을 무혈로 점령하였다. 그 후 태조는 삼한통합에 공을 세운 이희목에게 고려개국벽상공신에 훈록하고 벼슬이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을 기인(其人)으로 삼아 개경으로 데려갔다. 그 후에도 그의 자손에게 벼슬을 내려 요직에 등용하였는데 시호는 충민(充敏)이며 그의 증손인 문충공 (文忠公) 이정공(李靖恭)은 시어사문하시랑(侍御史門下侍郞)을 지내고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러 부평백(富平伯)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부평을 본관으로 세계(世系)를 계승해 왔다고 전한다.
허홍재(許洪材)
고려 인종 12년(1134) 문과에 급제하여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의종 18년(1164) 안남도호부사가 되었다. 그 다음해 안남도호부청사를 오리울(船串)에서 지금의 계산동 중구봉 밑으로 이전하였는데 이곳을 온수골(溫水洞)이라 불렀다. 그는 이곳에 초정(草亭)의 축대를 모으고 척서정(滌署亭)이라 이름하고 의종 24년(1170) 문하시중랑동평장사(門下侍中郞同平章事)가 되었다.

인물

김인수(金仁樹)
김인수는 수주 김씨의 시조이다. 그는 부평고을의 호족으로 부평 이씨와 쌍벽을 이룬 문벌로 후손이 소감(少監)을 지낸 김정실(金鼎實)이 있고 그의 후손은 번성하여 평안 남북도 지방에 수백 호가 살고 있다고 한다.
류흥정(柳興廷)
류흥정은 부평 류씨로 고려 말에 낭장을 지냈다. 고려시대 당시 부평고을에는 부평 이씨, 수주 김씨, 부평 류씨등이 대성(大姓)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부평 류씨는 살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다른 류씨로 통합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박아불화(朴阿不花)
고려 중엽 몽고는 막강하여 많은 나라들을 침략하였다. 고려도 이들의 침략에 항거하다가 급기야는 굴복당하고 말았다. 이후 고려는 몽고를 종주국으로 섬기고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다. 공녀(貢女)를 뽑아 보내야 했고 또한 내시(內侍:고자)도 바쳐야 했는데 공녀26만명과 내시 2백명을 바쳤으며 그들 내시 가운데 부평출신 박아불화(부평 박씨)도 뽑혀갔다. 그는 몽고 궁중에 있으면서 벼슬과 등급이 높아 권세도 부리게 되었다. 약소국인 고려는 종주국이 된 몽고와 외교를 할 때는 반드시 이들 내시를 통해서 추천하는 것이 통례였는데 이 공로로 박아불화는 계양군(桂陽君)에 봉직되기도 했다.
손변(孫 抃)
손 변은 굴재(橘峴洞)의 토박이 손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초명은 습경(襲卿)으로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고 천안판관이 되어 명판관으로 유명했다. 이어 공역서승(供驛署承)이 되고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는데 모함을 받아 해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그 후 경상도 안찰사가 되었는데 각종 송사가 일어날 때마다 이를 공정하게 판결하여 크게 이름을 날리는 등 평소 성품이 강직하여 공사를 다스림에 있어 칼로 대쪽을 쪼개는 것 같이 청렴결백하였으므로 매사가 물 흐르듯 하므로 가는 곳마다 업적이 많았다. 그 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고 고종 38년(1251)에는 수사공상서좌복야(守司空尙書左僕射)로 재직중 사망했다. 그는 천재로서 정승이 될 자질을 갖추었지만 명문 출신이 아니고 또 처가 미천한 집안 출신이라 늘 정승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주위에서 이혼을 권하면서 명문 집에 다시 장가들어 부귀영화를 누리라고 하였지만 손 변은 그의 처에게 나는 지금의 직책으로 만족한다고 하면서 이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는 공평무사한 청백리였으며 그 당시 부평 출신의 위인으로 윤징고 이 위와 더불어 계양삼걸(桂陽三傑)이라 일컬었다. 명판관 손 변의 송사판결 실례를 한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손 변이 경상도 안찰사로 재임 때 그 지방에서 남매간에 송사가 벌어졌다. 그 송사 내용인즉, 자기누이가 부모님의 유산을 혼자 독차지하고 상속될 자신에게는 한푼도 안 주어 억울하니 자신의 몫을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이의 답변은 아버지가 임종하실 때 재산의 전부를 자신에게 남기고 동생에게는 옷 한 벌 관(冠) 한 개 짚신 한 켤레 종이(韓紙) 한권만 주라는 유서(遺書)를 남겼기 때문에 재산은 한푼도 줄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때 안찰사인 손 변은 누이동생 두 사람을 함께 불러 출두시킨 후 말하기를 누이인 너는 아버지가 임종시에 어머니는 어디 있었느냐 하고 물으니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시고 저는 출가해서 별거 중이었고 아우는 나이가 어린 학동이었다고 대답했다. 이 때 송사 내용을 검토한 손 변은 판결하기를 부모란 그 누구나 자식에 대한 애정은 똑같은 것인데 나이 들어 시집살이하는 딸에게는 후하고 부모 없는 어린 아들에게는 박절할 수가 있는가 이 어린아이가 의지할 곳은 오직 누나인 너뿐 이므로 너에게 전 재산을 준 것은 철모르는 아들에게 재산을 주면 누군가에게 빼앗길 것을 예상하고 염려되어 동기간인 너에게 전 재산을 주면 훗날 이 아이가 장성한 후 아버지의 재산을 네가 되돌려 줄 것으로 여기고 한 일이다. 네가 만일 아우에게 재산을 안줄 경우에는 아우는 아버지가 준 옷과 관을 쓰고 짚신을 신고 관청에 고소하면 해결될 것으로 여기고 아버지가 그렇게 하였던 것이라고 그들에게 설명하였다. 그들 남매는 손판관에게 감동하여 재산을 반분해서 갖게 되었다고 한다.
윤 수(尹 秀)
윤 수는 고려 충렬왕조 때 매방도감(鷹房都監)직에 있엇는데 그 당시 국영매방(國營鷹房)이 개경도성 안에 설치되어 있어 일반 민가에서 사육하는 가축(개 닭 등)을 마구 잡아 피해가 커서 원성이 높으므로 왕에게 진언하여 매방을 부평고을 경명현 고개로 옮기었다. 충렬왕이 매사냥을 즐겨하므로 윤수는 수차에 걸쳐 왕을 모시고 매사냥을 하였다.
윤징고(尹徵古)
윤징고는 현종 12년(1021) 고려 초기의 문신으로 초명은 원재(元載)로 수주의 속현인 수안현 사람으로 수안 윤씨의 시조인 윤 봉(尹 逢)의 후손이다. 성종 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목종 때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고 현종 4년(1013) 내사사인국사수찬관(內史舍人國史修撰官)을 거쳐 동9년(1018)에는 중추사(中樞史) 동11년(1020)에는 검교사도상주국(檢校司徒上柱國)에 오르고 동12년(1021)에는 검교태위(檢校太尉)에 올라 추충좌리공신(推忠佐理功臣)이 되었다. 해서에 능했으며 공무를 재결함에 있어 매사 공평정대 하였으며 모든 수하 사람들이 그가 말하지 아니하여도 두려워하며 솔선하였다. 그 후 상서우복야 (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장경공(莊景公)이다. 위의 내용 중 수안현 고을은 현재 김포 대곶면에 있었다. 그는 손 변(孫 ·) 이 위(李 瑋)와 함께 부평출신의 위인으로 계양삼호걸(桂陽三豪傑) 이라 불렀다.
이 도(李 璹)
이 도는 부평백 이정공의 큰아들이며 장숙공 위(瑋)의 형으로 예종 1년에 낭장(郎將)이 되고 인종 6년에 검교사도수사우복야(檢校司徒守司右僕射) 예부사(禮部事)를 지내고 이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그의 처남 평장사 김인규(金仁揆)가 이자겸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므로 그의 집을 점거하고 가산과 노비까지 몰수하였다. 후에 김인규가 귀양에서 풀려나와 이 도를 문책하였더니 그는 김인규를 역모로 어사대에 모함했던 것으로 면직당했다.
이 서(李 書)
이 서는 부평 이씨의 삼세(三世)로 이능목의 아들이다. 그는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에 추봉되었다. 그의 아들 이정공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시호는 (文忠)으로 순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이 습(李 ·)
이 습은 고려 충렬왕 때 궁실(宮室)의 궁첩(宮妾)과 결혼하여 권좌에 올랐다. 그는 매방을 담당하게 되어 매사냥을 좋아하는 충렬왕을 모시고 부평고을 경명현에 설치된 매방으로 수차 안내하여 왕의 총애를 받게되고 권세를 누렸다.
이 위(李 瑋)
공예태후(恭睿太后)의 외조부이다. 성종조에 그는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호부외랑(戶部外郞)을 지냈다. 숙종 원년(1096) 영주목부사(營州牧副使)가 되고 동4년(1099)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동9년(1104) 직문하(直門下)로 서북면 해영병마사를 제수받아 임 간(林 幹)과 함께 여진정벌에 큰 공을 세워서 그 해 12월 좌리공신(佐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 이듬해 추밀원사(樞密院使)로서 윤 관(尹 瓘) 오연용 (吳延龍) 임 언(林 彦) 등의 패전한 죄를 극론한 바 있다. 예종 4년(1110) 10월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고 접반신(接伴臣)으로 송나라에 다녀온 후 형부상서(形部尙書)가 되었고 이어서 그 이듬해 11월 호부사 겸 서경유수사(戶部事兼西京留守使)가 되었다. 동7년(1112)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오르고 그 이듬해 11월 상주국(上柱國)이 되었다. 동11월(1116) 6월 이부상서수태보문하시중(吏部尙書守太保 門下侍中)이 되었고 이어서 그 이듬해 수태복계양부개국백(守太僕桂陽府開國伯)에 봉해졌다.

인종 5년(1127) 중서령진정공신(中書令鎭定功臣)의 호를 내리고 식읍(食邑) 3천호에 식실봉(食實捧) 3백호를 받았다. 인종 11년(1133) 85세로 장수하고 세상을 떠나서 장숙공(莊肅公)의 시호를 내렸다. 또한 그는 일찍이 사위되는 임원후(任元厚)의 처인 딸이 공예태후(恭睿太后)를 잉태했을 때 꿈을 꾸고 훗날 왕비가 될 것을 예언했는데 그 예언이 적중되어 인종왕비가 되었으니 인주(仁州) 이씨가 역신으로 몰려 망하고 부평 이씨의 세상으로 변하였다.

그 당시 부평고을의 지명 변동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곳 부평의 칭호가 고려 현종 9년(1018) 장제(長堤)가 수주(樹州)로 됐고, 의종 4년(1150) 수주가 안남(安南)으로 개칭되었으며 그 후 고종 2년(1215) 안남(安南)이 계양(桂陽)으로 변경되었으며 충렬왕 24년(1308) 계양이 길주(吉州)로 목사 고을로 되더니 충선왕 2년(1310) 부평(富平)으로 되기 시작하였다. 이상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때 인물록 내용의 부평백(富平伯) 계양백(桂陽伯) 부평군(富平君)이라 함은 수주백(樹州伯)이라 했어야 맞을 것 같다. 그는 윤징고(尹徵古) 손 변(孫 ·)과 함께 부평출신의 위인으로 계양삼호걸(桂陽三豪傑) 중 한 사람이다.
이능목(李能睦)
이능목은 부평 이씨 시조이며 고려 개국벽상공신 이희목(李希穆)의 아들로 볼모(其人)로 개경에서 살았다. 그의 벼슬은 어위주부(御衛主簿)에 추증되었다.
이정공(李靖恭)
이정공은 부평 이씨 시조 고려통합 삼한개국벽상공신 이희목(李希穆)의 증손이며 지금도 그 후손들이 작전동에 살고 있다. 그는 고려 문종 때의 문신으로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문종 13년(1059)에는 예부외랑을 지냈으며 이어 남원부사가 되었다. 재직 중 삼예도(三禮圖) 5천부와 손유자서 (孫柳子書) 92부를 신조하여 문종왕에게 바쳤는데 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상으로 의상을 내렸다. 그리고 내직에 임용되어 한림학사, 예부상서, 병부상서, 태사빈객, 참지정사, 수국사 등의 요직을 지냈다. 문종 37년(1083)에는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고 선종 때는 문하판상서이부사 (門下判尙書吏部事)를 지냈다. 숙종 2년(1097)에는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숙종 4년(1099) 5월에 그가 죽으니 왕은 애석하게 여겨 조위교서를 내려 부평백(富平伯)에 봉직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그리고 순종묘정에 배향하였다.

조선시대

명관

목진공(睦進恭)
목진공은 태종 때 문신으로 여러 요직을 거쳐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태종 17년(1417) 부평부사로 있을 때 우희열(禹希烈)이 부평평야의 개간 신청을 하므로 이를 품계하여 태종의 윤허를 받아주니 우희열이 이를 착수하여 기존의 수전(水田) 450결(結)이 개간 후 1천 결로 확장되어 찬양이 대단 하였다. 1결은 수확량을 기준으로 한 면적표시로 토질의 비적에 따라 일정하지 않고 4천평에서 7천평 내외였다.
박희방(朴熙房)
고종 때 부평부사를 지냈다. 그가 재임 중 계양산 경명현(景明峴) 좌우에 중심성(衆心城)을 축조하고 공해루(控海樓)를 지어 군대를 배치하고 서해로 침입하는 외국군대의 감시와 침공에 대비하였다. 이 중심성을 완공하고 기념비를 세웠는데 지금은 비초석만 남아있다.
심신겸(沈信謙)
심신겸은 청송 심씨로 돈녕부사 청룡부원군 심 강(沈 綱)의 둘째 아들이다. 형 심의겸(沈義謙)과 벼슬길에 올라 가산군수를 지냈다. 당시 임진란이 일어나자 그는 군대 식량공급에 노력하여 공을 세웠고 그 후 선조 33년(1600)에 부평도호부사를 지냈으며 말년에는 부평고을 둑실(둑실동)에 낙향하였다.
윤명선(尹明善)
윤명선은 파평 윤씨로 그의 자는 택중(澤中)이었다. 명종 22년(1567)에 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후 선조 13년(1580)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보직되었다. 그 후 형조좌랑에 오르고 임진왜란 때에는 황해도사 (黃海都事)로 류 근(柳 根) 윤자신(尹自新) 등과 종묘신주(宗廟神主)를 모시고 평양까지 갔었으며 그 후 예조정랑(禮曹正郞)이 되고 부평ㆍ장흥ㆍ평산부사 등을 거쳐 양주목사(楊州牧使) 제용감정(濟用監正) 등을 지냈다. 그가 만년에 부평부사로 부임하여 그의 선조 윤 관(尹 瓘)께서 수주수령을 지냈던 것을 알고 이곳 계양 오류동에 낙향하였다. 그가 죽은 후 조정에서 그에게 도승지에 추증하였고 후손들은 이곳에 집단 거주하면서 효자가문이 되었다.
이낙보(李樂甫)
이낙보의 자는 하조(賀朝)이고 본관은 연안(延安)으로 이정관(李靜觀)의 막내아들로 숙종 24년(1698) 7월 9일자 부평태수로 부임하였다. 그 이유는 김포 장능 방화범으로 죄인이 된 최필성(崔弼成)의 태생지 (胎生地)가 부평이라는 사유로 숙종 24년(1698) 3월 30일 부평도호부가 부평현으로 강등됨에 따라 고을 수령의 직분도 낮아진 것이다. 그가 부평태수로 부임한 후 정사를 선치(善治)하였는데 동헌을 사무헌 (使無軒)이라 이름하고 향민들의 모든 송사를 없애니 사무송(使無訟)이라 했다.

숙종 때 유학의 대가 문간공(文簡公) 농 암(農 巖) 김창협(金昌協)은 이낙보(李樂甫)의 치적을 찬양하는 사무헌기(使無軒記)를 숙종 36년(1710) 4월에 기술하였다. 그 후 숙종 43년(1717) 9월 하순 부평도호부사 어유봉(魚有鳳)은 사부인 농 암이 쓴 사무헌기에 추기를 했다. 낙보원은 옛 안남도호부 때 태수 허홍재(許洪材)가 세운 척서정이 초청으로 너무 퇴락되어 초라하므로 그 후 이실충(李實忠) 부사가 정자를 다시 세워 이를 복원하였다. 숙종 26년(1700) 5월 27일 진무사(鎭撫使)가 되어 체임되었는데 숙종 33년(1707)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조병노(趙秉老)
조병노는 부평부사(富平府使)로 재임하던 중 특이할 사항으로는 고종 3년(1866) 프랑스 함대가 부평관하 해역에 불법 침입해옴으로 그는 중군(中軍) 홍윤석(洪胤錫) 좌수(座首) 이사권(李思權) 등을 대동하고 난지도(蘭芝島)와 호도(虎島) 앞 바다에 정박 중인 프랑스 기함을 방문하여 조선 영해에서 퇴각할 것을 엄중 항의하였던 사람이다.
홍윤석(洪胤錫)
홍윤석은 부평구 중군(부대장)으로 재임하던 중 고종 3년(1866) 프랑스 함대가 부평부관하 영해에 불법 침입하여 정박하고 있으므로 조정의 지시에 의해 부평부사 조병노 부평좌수 이사권과 함께 난지도 및 호도에 정박 중인 프랑스 기함을 방문하여 조선 영해 안에서 퇴거하라고 엄중 항의하였던 장군이다.

효자

효자 김광계(金光啓)
김광계는 김해 김씨로 부평고을 작전동에서 태어났으며 고려 때 정승 김인경(金仁鏡)의 12대 손이고 이조 때 명신 김충한(金·漢) 판서의 8대 손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효행이 남달리 뛰어나 7세 때 아버지 상을 당하여 그 거상(居喪)하는 모습이 어른과 같았다. 평소 어머니께 정성껏 봉양하면서 어머니의 건강을 하늘에 기도하였고 병환이 나신 어머니가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받아 약에 타서 드리니 효과를 보아 회생하셨다. 그 후 모친이 돌아가시자 장례를 극진히 모시고 묘소 옆에 묘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인근 사람들은 이를 칭찬하고 존경하였는데 그는 항상 겸손하고 성실하였다고 한다.
효자 이응신(李應新)
이응신은 부평향교의 학생인데 어버이 섬김이 지극한 효자로서 병자호란을 당하여 그 전화를 피하고자 어머니를 없고 피난가는데 청군이 급히 쫓아오므로 모자가 다 살 수 없음을 예측하고 이응신은 어머니를 얼싸안았다. 청군은 이응신을 사정없이 칼로 내리쳤다. 다행히도 어머니는 무사했다. 그래서 그를 만고의 효자라 일컬었는데 인조 임금은 이 말을 듣고 효자 정려를 내렸다.
효자 추난원(秋煖源)
추난원은 이조 말기 고종 때 사람으로 부평읍(계산동)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 온 평민이다. 옛날부터 부평 뜰 한복판 한다리(大橋) 옆에 전지제(全之堤) 방죽 안에 유일하게 작은 섬이 있었으니 이를 전지도(全之島)라 하였다. 이 섬에는 마씨(馬氏) 성을 가진 사람의 산소가 크게 자리잡고 있어 마가묘(馬哥墓)라 불려왔다. 이 섬에 추난원이 부모 산소를 썼는데 그는 본시 성품이 온순하고 또한 재산도 많아 선조를 모시는 제사는 남달리 정성스러웠고 부모에 대한 효도가 극진하였다. 아버지가 병이 드니 그는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온갖 정성을 다 들여 간호를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로 끝내 돌아가셨다. 그는 전지도인 마가묘에다 장례를 모시고 산소 옆에 묘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의 집과 묘소는 5리 정도로 가까웠으나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한번도 집에 가지를 않았다. 그 때 추효자 부부는 한참 젊었을 때이므로 그 부인은 남편과 헤어져 몇 해를 독수공방으로 밤을 지새다 보니 도저히 참을 길이 없어 야밤에 은밀히 남편을 대하기 위해 전지도 묘막으로 찾아가곤 했다. 그때마다 부인을 위로하며 타일러 그대로 보내곤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서씨 부인이 또 남편을 찾아와 그리워 살 수 없다고 애원하면서 그의 품에 안기니 마음 착한 추 효자의 절의는 산산조각이 나고 그 후 서씨 부인은 잉태하여 배가 차츰 불러오니 마을 사람들은 그를 의심하게 되었다. 그 부인은 추 효자가 3년 시묘를 끝내기 직전인 고종 29년(1892)에 아들을 낳았다. 옛날에는 상중에 임신하면 효자로 인정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추 효자는 3년 정성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근년까지도 한번 실수로 정려를 못 받는 추 효자라고 전해오고 있다.

인물

계양삼호걸(桂陽三豪傑) 및 계양팔문장(桂陽八文章)
고려조 때에는 이곳 계양삼호걸로 윤징고(尹徵古) 손 변(孫 ·) 이 위(李 瑋)를 일컬었거니와 이조 중기 이후 계양산을 중심으로 대명사처럼 불리던 계양삼호걸은 박규문(朴奎文), 이 장(李 莊), 남 휘(南 揮)를 말하며 계양팔문장은 변혁조(卞赫朝), 박 선(朴 宣), 이 상(李 尙), 남 징(南 澄), 남 연(南 淵), 이동표 (李東標), 한세보(韓世輔), 양익현(梁益賢)을 일컬어 당대를 주름잡았던 인물들로 그 후손들이 지금도 문집을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당시 계양삼호걸 및 계양팔문장의 인물행적은 다음과 같다.

  • 계양삼호걸
    • 박규문(1670~1741)은 부평고을 오정(三井洞)에 정착한 박 선(朴 宣)의 아들로 세자시강원의 정4품 필선을 지냈으며 효성이 지극하기로 유명하였고 유서에서 ‘서산(瑞山) 부모 묘(墓)아래에 조그마한 자리가 있으면 그곳에 나를 묻어라. 그리하여 후손들이 나에게 성묘오면 나의 부모 묘도 함께 살피게 되어 오래도록 성묘가 끊이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하여 이를 실천케 하였으며 자신의 행적을 적은 행장(궁와집) 1권을 남겼다.
    • 이 장은 부평고을 오정(內洞)에서 활동하던 전주 이씨 효령대군 9대 손으로 생원을 지냈다.
    • 남 휘는 부평고을 오정(始月洞)에 정착한 계양팔문장가 중 한 사람인 남 연(南 淵)의 아들로 금부도사를 지냈다.
  • 계양팔문장
    • 변혁조(1730~1806)는 부평고을 오정(古康洞) 출신으로 정조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시의를 논한『시론』이 전해지고 있다.
    • 박 선은 부평고을 오정(三井洞)에 정착하였으며 1683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를 지냈다.
    • 이 상은 부평고을 오정(內洞)에서 태어나 생원을 지냈다.
    • 남 징은 부평고을 오정(始月洞) 출신으로 진사를 지냈다.
    • 남 연은 부평고을 오정(遠宗洞)출신으로 진사를 지냈다.
    • 이동표는 부평고을 소사(深谷洞)출신으로 진사를 지냈다.
    • 한세보는 부평고을 출신으로 그 외 기록은 알 수가 없다.
    • 양익현은 부평고을 출신으로 그 외 기록은 미상이다.

이 계양삼호걸과 계양팔문장은 계양삼걸(이 위, 손 변, 윤징고)을 본받아 일컬은 대명사로 실은 조선조 중기 이후의 인물로 부평삼호걸 부평팔문장이 맞는 말이다. 또한 이분들이 부천시의 인물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고성기(高聖基)
고성기는 부평고을 출신으로 고종 때 시장(市場)을 감독하는 승척감(升尺監)이 되어 현재의 장기동 소재 황어장(黃魚場) 관리 및 장세(場稅)를 징수하였다.
권 환(權 ·)
권 환은 안동 권씨로 부평고을 당뫼(동양동)에서 살았다. 자는 중장(仲章)이다. 그는 벼슬길에 올라 가선대부행성균관대사성 겸 동지의금부사를 거쳐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지냈다.
기복관(奇復觀)
기복관은 세종 때 문관으로 부정(副正)을 지낸 후 퇴임한 인물이다. 그는 부평고을에서 온천탐색사건 (溫泉探索事件)이 일어나자 본인이 온천 위치를 탐지한 결과 부평 향리(鄕吏)의 임야에 온천이 있음을 확인하였다고 왕께 상계(上啓)하였던 바 왕은 관리를 부평고을에 내려보내 온천의 사실 유무를 조사한 바 허위로 상계 하였음이 드러났다.
김 택(金 澤)
김 택은 부평 김씨 김 환(金 丸)의 자손이며 부평고을에서 출생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사정(寺正)에 이르렀다.
김 환(金 丸)
김 환은 부평 김씨의 중시조가 된다. 그의 선조가 신라 경순왕의 후예라는 것 외에 다른 기록은 없고 부평고을에 정착하여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살아왔다고 한다.
김 회(金 晦)
김 회는 세종 때 문관으로 내직(內職)에 있었다. 그때 부평고을에 온천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세종은 부평부사에게 온천장소를 즉시 보고하라고 지시하였으나 부평부사는 관하에 온천이 확인되지 않아 보고를 못하고 있었던 바 왕은 온천을 알고 있으면서도 보고치 않고 있는 것으로 오인하고 진노하여 김 회를 금부도사(禁府都事)로 임명하고 현지에 내려와 부평부 향리들을 심문케 하였으나 실지 온천이 발견된바 없으므로 향리들을 처벌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김상호(金尙瑚)
김상호는 김 환(金 丸)의 자손이라고 전하는 것 외에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으나 조선조 중기의 인물로 좌통례(左通禮)를 지냈다는 기록만 있다.
김순손(金舜孫)
김순손은 조선 중종 때 부평고을에서 승려(僧侶)가 된 사람이다. 그는 나라에 반역하였는데 그 이유로 부평도호부가 부평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수년이 지난 후에야 부평도호부로 환원되었다.
김시회(金時晦)
김시회는 광산 김씨로 일찍이 문관이 되어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使)가 되었다. 재임 중 부평고을 고성(古城)을 지키다가 왜군이 대거 침입하자 미리 겁을 먹고 도주하였다. 그 후 그에게 비난이 빗발치듯하니 스스로 자결하였다.
김안노(金安老)
김안노는 연안 김씨다. 조선조 중종 때 명신으로 정승(政丞)을 지낸 분이다. 그는 잠시 부평고을에 와서 중종 36년(1541) 부평의 운하(運河) 조성을 위해 시굴(詩堀)하였으나 암반벽을 뚫지 못해 실패하였다.
당문보(唐文輔)
당문보는 정조(正祖) 때 부평고을 동면(방축동) 출신으로 부평고을 제일의 부자였다고 하며 학식과 덕망이 높았다고 한다. 정조 22년 8월에 정조께서 선조에게 성묘하기 위해 김포장릉을 참배하였을 때 연회를 주선하고 접대비 전액을 부담하여 좌수벼슬을 제수 받았다고 한다.
당청룡(唐淸龍)
당청룡은 부평고을 동면 방축동 사람으로 당문모의 아들이다. 부자로 고을 사람들에게 선심을 베풀었으며 부평좌수가 되었다.
민이승(閔以升)
민이승은 숙종 때의 학자로 자는 언휘(彦暉)이고 호는 성제(誠齊)로 과거응시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서 (五書) 육경(六經)을 연구한 뒤 윤 증(尹 拯)의 문하에 들어가 그 재능을 인정받았고 당대의 석학 김창협 (金昌協)이 그의 학문의 깊이에 경탄하면서부터 더욱 명성을 떨쳤다. 숙종 8년(1682) 영능참봉에 임명 되었으나 사퇴하였고 그 후 효능참봉으로 부임하였으나 종부사주부(宗簿寺主簿)로 승진시키므로 그도 사양하고 제자백가의 연구로 여생을 보냈다. 그는 부평고을 작리(鵲里) 태생으로 박학다재(博學多才)하여 성리학(性理學)에도 정통하였다. 그는 숙종 23년(1697) 45세에 사망하였으며 문집 7권이 전하고 있다.
민종원(閔宗元)
민종원은 여흥 민씨로 부평고을 작리(鵲里)에서 태어났다. 광해군 때 문관이 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영유현령(永柔縣令)을 지냈다. 그가 죽으니 자헌대부공조판서(資憲大夫工曹判書)에 증직되었다.
박 인(朴 仁)
박 인은 밀양 박씨로 부평고을 박촌 사람이다. 묘비기록에 의하면 인조 때 벼슬이 용양위부호군 (龍衛副護軍)에 이르렀다고 적혀있다.
박대충(朴大忠)
박대충은 밀양 박씨로 계산동 사람이다. 임진란 때 왜병이 부평고을에 침입하여 향교에 불을 지르자 공자와 열성조 위판을 계양산정에 있는 장사굴로 옮겨 봉안하였다가 전란이 평정된 후에 다시 향교에 봉안한 공로로 참봉(·奉)의 벼슬을 얻고 부역을 면제받았다.
박무영(朴茂榮)
박무영은 부평고을 동면 박촌동 사람으로 이언복과 함께 부평향교 학생으로 있으면서 왜군에 의해 향교에 불이 나자 공자와 성현들의 위패를 계양산정 장사굴에 옮겨 봉안하였다가 난리가 평정된 후에 다시 향교에 봉안한 공로가 인정되어 참봉(·奉)의 벼슬이 내리고 부역이 면제되었다.
박상일(朴商一)
박상일은 조선조 중기에 부평부 동면(東面:박촌동) 출신으로 용양위부호군(龍·衛副護軍)을 지냈다.
박일상(朴一商)
박일상은 밀양 박씨로 부평고을 박촌 출신이다. 효종 1년(1650)에 벼슬하여 용양위부사과(龍讓衛副司果)에 이르렀다.
박주봉(朴周鳳)
박주봉은 부평고을 벌응절리(伐應節里) 출신이다. 그는 부자로 고종 7년(1870) 부평부 경명현의 중심성을 축조할 때 많은 헌금을 하고 감독(監督)을 지냈으며 당시 부평부 좌수(座首)를 역임하면서 부평항교전교 (富平鄕校典校)를 역임하는 등 부평고을 발전에 기여하였다.
박춘동(朴春東)
박춘동은 부평읍(계산동)출신이다. 그는 부자로 계양산(桂陽山) 중심성(衆心城)을 축조할 때 중군(中軍)에 재직하였다. 고종 7년(1870) 경명현(景明峴)의 중심성 축조를 완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심 식(沈 植)
심 식은 청송 심씨로 부평고을 둑실동 사람이다. 조선 정조 때 선무랑(宣務郞)을 지냈다.
심 유(沈 侑)
심유는 청송 심씨로 광흥서주부(廣興署主簿)를 지낸 심 이(沈 怡)의 손자이다. 자는 중직(重直)이며 부평고을 독실동(纛室洞) 출신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고 효종 1년(1650)에 사용(司勇)을 지냈다. 이 곳 둑실동에는 지금도 그의 자손들이 살고 있다.
심 율(沈 慄)
심 율은 부평부사를 지낸 심신겸(沈信謙)의 장남으로 초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진사를 지냈다.
심 이(沈 怡)
심 이는 청송 심씨로 부평부사를 지낸 심신겸의 후손으로 부평고을 둑실동에서 살았다. 인조 18년(1640)에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를 지낸 바 있다.
심신겸(沈信謙)
심신겸은 돈녕부사(敦寧府使) 청룡부원군(靑龍府院君) 심 강(沈 鋼)의 아들이며 영의정 심의겸(沈義謙)의 아우이다. 또한 명종(明宗) 왕비 심씨와 남매지간이 된다. 그가 벼슬을 하여 가산군수(嘉山郡守)를 지낼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량미 공급에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선조 28년(1595) 윤명선(尹明善) 부사의 뒤를 이어 부평도호부사가 되어 재임하다가 사퇴하고 부평고을 독실동(纛室洞)에 낙향하여 정착하였다. 그가 죽으니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우희열(禹希烈)
우희열은 부평평야를 개척한 공로자이다. 그는 태종 17년(1417)에 부평부사 목진공(睦進恭)과 협의하여 부평평야의 관개수로를 개설하여 수리안전답으로 만들어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안겨 준 공로자이다.
윤명선(尹明善)
윤명선의 자는 택중(澤中)이다. 명종 22년(1567) 초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고 선조 13년(1580)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보직되었다가 형조좌랑(刑曹佐郞)을 거쳐 임진왜란 때에는 황해도도사 (黃海道都司)로서 류 근(柳 根) 윤자신(尹自新) 등과 종묘신주(宗廟神主)를 평양까지 무사히 모셨다. 그 후 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쳐 부평 장흥(長興) 평산(平山) 부사(府使)를 지내고 양주목사(楊州牧使) 제용감정 (濟用監正) 등을 지냈다. 윤명선이 부평부사로 부임하여보니 선조인 윤 관(尹 瓘) 장군의 전임지(前任地)임을 알게 되어 부평고을 계양 오류동(梧柳洞)에 낙향하였다. 그가 죽으니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으며 후손들은 효자가문으로 유명하였다.
이 달(李 達)
이 달은 부평 이씨 시조 이희목의 16대손으로 선조 및 광해군 때 무신이다. 자는 통수(通秀) 또는 명숙 (明叔)이고 호는 운포(雲圃)로 문무를 겸비한 재질을 가졌는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최 강(崔 堈) 등과 진주성 방어전에 참가하여 크게 전공을 세워 훈련원정(訓鍊院正)에 특별히 임용되었다. 그 후 권무과(勸武科)에 급제하여 광해군 6년(1614) 양산 군수에서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어 내직으로 상경 도중 훗날 갑자사화(甲子士禍)의 직접 원인이 되는 폐모론(廢母論)이 조정에서 일어난 소식을 듣자 일부러 낙마(落馬)하여 팔이 부러졌음을 핑계로 선전관에 취임하지 않았다. 그 후 삼도통제우후(三道統制虞侯)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그 이듬해 (1615)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 매(李 枚)
이 매는 부평 이씨 10세손으로 고려말 충신인 이 의(李 倚)의 장남이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아 불사이군의 순절을 지키다가 세상이 변하였음을 깨닫고 세종 때 응시하여 생원 벼슬에 합격한 후 여러 벼슬을 거치어 사직(司直)을 지냈다. 훗날 그가 죽으니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이 비
이 비는 부평 이씨 10세손으로 고려 충신 이 의의 둘째 아들이다. 그의 초명은 이 규이고 이 매의 아우이다. 그는 태종 11년(1411)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문관벼슬을 거쳐 통정대부예문관직제학 (通政大夫藝文館直提學)에 이르렀다.
이 옹
이 옹은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로 영신군(永新君)의 둘째아들이다. 그는 부평고을 효성동(曉星洞)에서 태어나 왕족이라 부수(副守)에 제수되었다가 나라에 공이 있어 승헌군(承憲君)에 봉해졌다.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정직하여 유명한 학자로 이름을 날렸으며 또한 강직하고 청백한 선비로 어전에서 치평지도 (治平之道)를 건의할 정도였다. 그는 정조 21년(1797)에 사망하였다.
이 이(李 怡)
이 이의 자는 지보(知甫)이고 단종 2년(1454)에 출생하였다. 그의 조부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이요, 아버지는 의성군(宜城君)이다. 나라에 공을 세워 영신군(永信君)에 봉해졌고 가현부락(鵲田洞)에 낙향하였다. 그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벼슬을 하여 부평의 명문거족이 되었으며 그는 73세로 사망하였는데 이 고을의 명당인 가현(佳峴:鵲田洞)에 묻혔고 그 묘역은 현재 인천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이 진(李 震)
이 진은 대사간을 지낸 이 림(李 霖)의 아우가 된다. 그는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문관을 거쳐 부사(府使)가 되었으며 형인 이 림을 평안하게 모시기 위해 부평고을 박촌동(朴村洞)에 악각정이라 하는 정자를 지었다.
이경심(李敬心)
이경심은 부평 이씨 이용운의 아들이며 부평 출신으로 자는 사린(士隣)이다. 그는 명종 1년(1546)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문관 벼슬을 지냈다.
이계록(李繼祿)
이계록은 부평 이씨로 자는 중수(中綬)이고 중종 23년(1528)에 부평고을 작전동에서 태어났다. 선조 15년 (1582)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참봉(參奉)이 되었고 선조 24년(1591)에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연안성을 수호하며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었는데 그 후 춘방태각(春坊台閣)에 오르고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만사를 지었다. 선조 35년(1602)에 사망하였으며 나라에서 가선대부이조참판(嘉善大夫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이계정(李繼禎)
이계정은 부평 이씨 이 옥(李 沃)의 셋째아들이다. 그는 중종 37년(1542)에 출생하여 명종 22년(1567) 초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선조 3년(1570)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통훈대부 (通訓大夫) 사도시정(司導寺正)에까지 올랐다.
이관지(李寬志)
이관지는 고종 말 거관인 통차(統差)로 있으면서 부평 경내에 침입한 도적사건에 대하여 이들을 검거하는 데 공이 컸다.
이덕일(李德一)
이덕일은 부평 이씨로 자는 자정(子精)이며 병조좌랑(兵曹佐郞) 이계록(李繼祿)의 차남이다. 선조 22년(1589) 사마시(司馬試)에 장원급제하였으나 벼슬은 하지 않고 경학(經學)에 몰두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진하여 왜병을 물리쳤다. 선조 40년(1607) 문과에 급제하고 통훈대부사간원정언(通訓大夫 司諫院正言)을 지냈다. 자기의 동서가 되는 광해군(光海君)의 폭정으로 실의를 느껴 외직(外職)을 자원해 익산군수(益山郡守)가 되었고 그로 인하여 훗날 광해군이 왕위에서 물러났을 때 화를 면했다. 인조 20년(1642) 사망하니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이배근(李培根)
이배근은 부평 이씨 이종시(李宗試)의 아들이며 자는 자강(子降)이다. 중종 8년(1513)에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문관벼슬을 거쳐 재정(宰正) 부사(府使)등을 지냈다.
이병율(李秉律)
이병율의 자는 관오(寬吾)로 철종 3년(1852) 11월 25일 부평부 서면(化田) 부평 이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벼슬이 통훈대부로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에 이르러 흔히 된밭(작전1동)이 감찰댁으로 불려왔다. 그 아들 연식(演植)의 자는 경집(敬集)으로 고종 10년(1873)에 태어나 벼슬이 종사랑(從仕郞)에 이르렀고 이 부자가 갑오개혁(1984)으로 퇴임하였으나 부평인으로는 조선조의 마지막 벼슬로 보인다. 이병율 감찰의 아버지는 면영(冕永)으로 자는 치겸(致兼)으로 음사(陰仕)로 가선대부 행동지 중추 부사 겸 동 돈녕부도정 (嘉善大夫 行同知 中樞府使 兼 同 敦寧府都正)을 지냈고 조부는 진창(鎭昌)으로 자는 의섬(義贍)으로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 의금부사(嘉善大夫 兼 同知 義禁府事)가 중직된 누대의 명문이었다.
이선린(李善麟)
이선린은 전주 이씨로 성종대왕 후손인 경명군(景明君)의 후손이고 완성군(婉城君) 이 종(李 悰)의 아들이다. 자는 응서(應瑞) 선조 16년(1582) 12월 5일생이다. 벼슬은 정의(正義) 순강군(順康君)에 봉해졌고 후에 부평 고을 동양동에 낙향하였다.
이선봉(李善鳳)
이선봉은 전주 이씨 왕족이고 나라에 공이 있어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다. 부평고을 동면(동양리)에서 살았고 부인은 영월 엄씨였는데 그 가족들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피난했는데 마침 청나라 군사가 강화도에 상륙하였고 닥치는 대로 양민을 살해하였으나 엄씨부인은 적군에 잡혀 죽기보다는 스스로 죽겠다고 자결하고 말았다. 그의 아들 이필험(李必·)은 부평고을 당뫼(동양동)에서 출생하여 벼슬길에 올라 판관을 지냈으며 병자호란 때 그의 처 구씨는 시어머니를 따라 강화도로 피난을 갔는데 시어머니가 자결하자 여자 종의 치마폭에 유서를 써놓고 자결하였다. 이 사실이 훗날 알려져 이들 고부에게 열녀의 정려(旌)가 내려 졌으며, 현재 이 묘소는 시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세혐(李世·)
이세혐은 왕족인 전주 이씨 순평군(順平君) 이선린(李善麟)의 아들이다. 부평고을 동양동(東陽洞) 출신으로 일찍이 문과 벼슬을 한 후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이언복(李彦馥)
이언복은 부평고을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부평향교의 학생으로 자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병이 부평 고을에 와서 부평부청사와 향교에 불을 질러 그 일부가 소실되게 되었다. 그때 이언복과 그의 동료인 박무영 (朴茂榮) 박대양 등은 향교에 모셔진 공자와 성현들의 위패를 계양산정(桂陽山頂)에 있는 장사굴(將士堀)에 은밀히 옮겨 봉안하였다. 이후 그 공로가 인정되어 나라에서는 참봉(·奉)의 직함을 내리고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이익원(李翼元)
이익원은 부평 이씨 이정함(李廷咸)의 아들이며 부평 출신이다. 자는 성휴(聖休)이다. 통덕랑(通德郞) 벼슬을 하면서 영조 14년(1738)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문관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예조참(禮曹參判) 병조참판 (兵曹參判)등을 지냈다.
이정제(李廷濟)
이정제는 부평 이씨 이세유(李世維)의 아들로서 부평고을 출신이다. 자는 중방(仲·)이고 호는 죽호(竹湖) 이다. 그는 숙종 26년(1700)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문관을 거쳐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었으며 의금부사 (義禁府事) 대사헌(大司憲)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시호(諡號)는 효정공(孝貞)이다.
이제가(李悌可)
이제가는 부평고을 사람으로 전주 이씨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이 되었는데 북청판관(北靑判官) 재임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조정에서는 전란을 피하기 위하여 왕자위 (王子瑋)를 북청으로 보내기로 하고 자원군 윤탁연(尹卓然)이 왕자를 모시고 북청에 머무르도록 하였다. 이때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대부대가 북청을 통과할 때 이제가는 부하를 거느리고 왜병과 격전을 벌였는데 중과부적이라 용감히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니 그에게 벼슬을 높여주고 충신의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이제민(李齊閔)
이제민은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로 함원군(咸原君)의 차남이다. 그의 자는 경민(景閔)이고 호는 서간 (西澗)이다. 그는 부평고을 효성동(曉星洞) 명문대가 출신이다.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참찬(參贊) 대사헌(大司憲) 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41년(1608)에 죽으니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다.
이종호(李宗顥)
이종호는 부평 이씨 이극효(李克孝)의 장남이다. 예종 1년(1469)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當) 은대(銀臺)에 올랐다. 후에 예조참판, 경기도 관찰사, 한성부 좌윤등을 지냈으나 단명하여 37세에 요절하였다.
이필형(李必馨)
이필형은 부평고을 당뫼(동양동)에 낙향해 온 순강군(順康君) 이선린(李善麟)의 아들이다. 광해군 7년(1615)에 출생하였고 자는 문원(聞遠)이다. 인조 20년(1642)에 수의부위(修義副尉) 및 적순부위 (迪順副尉)를 지냈으며 인조 24년(1646)에는 진용교위(進勇校尉)에 선전관(宣傳官)을 겸임하였다. 그 후 진위장군(振威將軍) 겸 선전관 선략장군(宣略將軍) 겸 선전관 어모장군(禦侮將軍) 겸 선전관을 지냈다. 인조 26년(1648)에 행오위도총부도사(行五衛都摠府都事)에 이르고 통훈대두(通訓大夫) 행평해군수(行平海郡守)에 올랐으며 이어 행용양위부사과를 지내고 충무위사과(忠武衛司果) 행평해미현감(行平海美縣監) 자산군수(慈山郡守)행용양위부호군 겸 경주영장(慶州營將) 그리고 행충무위부사과 및 행호분위부사과 통정대부 경원부사(慶源府使) 우림위장군(羽林衛將軍) 첨지중추부사 (僉知中樞府事) 겸 우림위장 행호분위부사과 겸 우림위장 명천도호부사 별천무과수사(別薦武科水使) 등의 요직을 지냈다. 그의 공적이 너무 커서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올랐다.
이홍재(李弘載)
이홍재는 부평 이씨 18세손으로 익산군수를 지낸 이덕일(李德一)의 차남이며 부평고을 출신이다. 자는 중거(重車)이다. 초시에 합격하고 진사(進士) 세마(洗馬)가 된 후 인조 16년(163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문관을 지내고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다. 그가 효종 5년(1654)에 사망하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전 림(田 霖)
전 림은 무관으로 힘이 장사이고 용감하여 전국 각처에서 도적떼를 소탕하는데 공이 컸다. 중종 4년(1509) 부평고을에 도적떼가 치열하여 백성을 괴롭히므로 조정에서는 전 림 대장(田 霖 大將)을 파견하여 이들을 소탕하도록 명하였다. 전 림은 즉시 부평고을에 내려와 도적떼를 근절하였고 그후 전 림이 죽으니 다시 도적떼가 일어나 백성의 피해가 막심하였다.
정희량(鄭希良)
정희량의 자는 순부(淳夫)이고 호는 허암(虛庵)이다. 허암은 그가 거주하는 부평 계양산 서북쪽 허암봉에서 유래한 것이다. 본관은 해주(海州)로 부사(府使) 정연경(鄭延慶)의 아들로 태어나 사림파 (士林派)의 종조(宗租)인 점필제(占畢濟)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성종 23년(1492)에 수석으로 생원(生員)에 합격했다. 연산군 원년(1495)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이 되었다가 소장(疏章)을 지은 죄목으로 귀양을 갔다. 연산군 3년(1497)에 예문관 대교(待敎)로 보직되어 상소를 올리기를 환관(宦官)을 억제하며 학교를 숭상하고 이단(異端)을 물리치며 상벌을 공정히 하고 재용(財用)을 절제할 것이라 하여 왕의 미움을 샀다.

연산군 4년(1498)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이 때에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이에 연루되어 의주로 유배되었다가 김해로 이배되었으며 연산군 7년(1501)에 풀려났다. 연산군 8년(1502) 에 모친상을 당하여 집상하던 중 장차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날 것을 미리 짐작하고 표연히 집을 나가 김포 강변에 상복과 짚신을 벗어놓고 자취를 감추어 세상 사람들이 모두 강물에 빠져죽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뒤 정희량은 이천년(李千年)으로 변성명하고 산사를 유력하다가 만년에 평북 정주군 심연동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정희량은 성질이 강하고 영달에 마음이 없었으며 문장과 시문에 능하고 음양학(陰陽學)에도 밝았다.

정희량이 김포 강변에서 자취를 감출 때 지었다고 하는 시가 전하고 있다.
日暮倉江上 해저문 푸른 강 위에
天寒水自波 찬 물결 절로 이는데
孤舟宣早泊 쪽배는 임의 강가에 대었으되
風浪夜應多 오늘밤에는 풍랑이 사납겠구나
홍세회(洪世澮)
홍세회는 부평고을 당미(동면) 사람으로 벼슬에는 뜻이 없어 오직 학문과 도학을 연구하였고 후진교육에 공이 있어 계양처사(桂陽處士)로 불리었다. 박촌동에 공적비가 있었는데 도시개발로 인하여 없어졌다.

개화이후

명관

양재창(梁在昶)
양재창은 부천군수로 부임하여 재임 중인 1927년 4월 3일자로 부평수리조합(富平水利組合) 설립을 인가받아 부평평야에 수리조합을 조성하였다. 후에 그는 초대 조합장을 역임하였다.
정대위(丁大偉)
정대위는 부평군수(1902)로 재직중 부평소학교 교장을 겸직하였다.
정운구(鄭雲衢)
정운구는 부평군수(1909)로 재직중 부평소학교 교장을 겸직하였다.

인물

강한성(姜漢成)
강한성은 부천군 계양면 귤현리(귤현동) 출신이다. 그는 사업가로서 경향정미소(정부양곡도정업체) 경향산업사, 한일연탄공장, 경향주유소, 경향여객운수회사 등을 경영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또 북구청자문위원, 인천시자문위원, 상공회의소의원, 통일주체국민회의 북구대표의원 등을 역임하고 부평지역 발전에 기여하였다.
권병훈(權丙勳)
권병훈은 안동 권씨로 부평고을 당산면 동양리(東陽里)출신이다. 대사성(大司成) 권 환(權 環)의 6세손으로 개화 초기 신식교육을 이수하고 한말 고종 17년(1880)에 황해도 재령재판소(載寧裁判所) 검사(檢事)를 역임하였다.
충신 김득남(金得男)
김득남은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곳에서 무관을 지냈다. 한강을 지키는 첨사(僉使)로 재임하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 14년(1636) 임진 12월 청태종(淸太宗)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심양(瀋陽:지금의 봉천)을 떠난 지 불과 10여일 만에 한양(漢陽)에 육박하여 쳐들어왔다. 44년 전 임진왜란의 뼈저린 고생을 상기하고 한양성 안에서는 모두 피난을 떠나느라 온 장안이 술렁대며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나라에서는 원임대신 윤 방 (尹 昉)으로 하여금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비, 원손, 세자인 봉림대군(鳳林大君) 등을 데리고 강화도로 피신토록 하고 인조도 뒤따라 강화도로 피난을 떠났지만 이미 청군이 길을 막으니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길을 돌렸다. 그 때가 청군들이 강화도를 함락하고 한양성을 침공할 무렵이었다. 서해 병참기지인 철곡첨사 (鐵谷僉使) 김득남은 용감하고 충직한 장군으로 그는 부하를 이끌고 부평땅 굴포교 강화 길목을 차단하고 청군의 한양 진격을 저지하였다. 김장군은 예하 부대와 도중에 가담한 의병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결사적으로 분전하니 청군들은 할 수 없이 길을 돌려 그 남쪽에다 돌다리를 새로 놓고 통과하였다. 이 다리가 동양동과 상야동 사이의 굴포천 다리로 『부평읍지』에는 굴포석교(掘浦石橋)로 나오는데 오랑캐가 놓고 건너갔다고 하여·오랑캐 다리·또는·호교(胡橋)·라 불려왔다. 김장군은 다시 청군을 쫓아가 말을 타고 적병을 저지하며 용감히 싸웠으나 수백 배가 넘은 적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드디어 적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부하들도 거의 다 죽고 말았다. 난이 평정된 후 나라에서 그의 훈공을 가상히 여기어 벼슬을 높여 주고 충신의 정려를 내렸다. 그는 강화 표충사(表忠詞)에 병자호란 때 유공한 사람들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연려실기술(然藜室記述)』에는 이를 이렇게 적고 있다.『철갑첨사 김득남은 22일 자원 출전한 의병 30여명을 스스로 이끌고 부평 땅에서 전쟁을 하였는데 말을 타고 좌충우돌 정신없이 용전분투하였다. 적의 화살이 안면에 맞아 결국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 후 표충사에 배향하였다』 라고 했다.
김성호(金聖鎬)
김성호는 부천군 계양면 출신이다. 1964년에 장기리(場基洞)에 사설 우체국을 신설하고 우체국장이 되어 우체업무에 기여했다.
김원순(金元順) 이공우(李公雨) 최성옥(崔成玉)
김원순, 이공우, 최성옥 등은 기미년 3월 24일 계양면 장기리에서 벌어진 만세사건에 가담하여 시위를 벌인 뒤 계양면 서기(桂陽面書記) 이경응이 당국에 밀고한 것으로 오인하고 시위 군중 수십명과 작당하여 이경응의 집을 헐어버렸다. 이에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각기 10월씩 징역을 살고 나왔다.
박병오(朴炳吾)
박병오는 부평고을 부평읍(桂山洞) 출신으로 한말에 감찰을 지냈다. 만년에 도두리 황무지 개척사업 (서운동 지역)으로 부자가 되었으며 그의 외아들 박용직(朴容直)은 농사에는 뜻이 없고 연예계에 몸담아 방랑하므로 도두머리 방죽안 땅을 결국 인천의 갑부 장래희에게 넘기고 말았다.
심상은(沈相殷)
심상은은 청송 심씨로 부평부 계양면 둑실리 출신이다. 평생 한학 연구에 전념하며 학식과 덕망이 높았다. 후에 부평향교 전교를 지냈다.
지사 심혁성(沈爀誠)
1919년 기미 만세운동이 일어난 2년 후의 일이다. 때는 신록이 우거지는 5월 초순 지금의 장기동(場基洞)인 황어장터에서 장날 30대의 청년 한 사람이 장돌뱅이 행상들의 물품을 모두 사서 한곳에 쌓아 놓고 ·돈 안 받고 거저 드리니 한가지씩만 마음대로 가져가시오·하고 소리쳐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시작하여 닷새에 한 번씩 열리는 황어장날이면 꼭 나와서 선심을 썼다. 이 청년이 다름 아닌 2년전 기미 3·1운동 때 관서 지방에서 가장 큰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나온 주모자 심혁성이다. 그는 나라가 없어졌는데 재산이 무슨 소용이냐고 계양면 오류리(梧柳洞)에 있는 자기 가대와 전답을 헐값으로 팔아 3·1만세를 불렀던 그 장터에 나와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생필품을 나누어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 재산을 없애고 ·나는 대한의 백성이지 왜놈이 될 수 없고 한푼의 세금도 낼 수 없다·하면서 처자식을 거느리고 두메산골로 은신하고 말았다. 지리산과 덕유산으로 또 강원도 심산유곡으로 산사람으로 30년간 약초를 캐어다 팔아 연명을 해가며 오직 조국의 광복만을 염원하였던 것이다. 또한 만주 등지를 왕래 하면서 우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을 거들었던 것이다. 그는 유명한 청백리 청천당 심수경(沈守慶)의 후손으로 원래 성격이 쾌활하고 의리가 있으며 천도교 (天道敎)를 신봉하여 교주 손병희(孫秉熙) 선생의 교훈이 그의 애국심을 북돋아 준 것이라 믿어진다. 8·15 해방 후 산사람 생활을 청산하고 적수공권으로 고향인 풍산 심씨 마을인 백석동으로 돌아와 여생을 조국에 이바지하다가 죽었다. 선조인 심정승 수경(守慶)은 임란공신으로 의병을 모아 팔도의병대장 (八道義兵都大將)이 되어 왜군과 싸웠고 말단 관리로부터 시작한 벼슬이 우의정(右議政)까지 지내면서도 결백한 행실로 나라에 공헌한 분이다. 이 심혁성 역시 조상의 기질을 타고나 명리를 헌신짝 같이 버린 근세에 드문 부평지방의 우국지사였다.
안병혁(安炳赫)
안병혁은 고종 말 부평고을 작전동 출신이다. 개화기 교육을 받고 구한말 내무부 주사(主事)를 지냈다. 고향에 내려와 부평군 서면장(西面長)을 역임하고 계양면장으로 있을 때 기미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때 군중들의 청탁으로 태극기를 그려주는 등 많은 일을 도왔다. 또한 순절한 이은선(李殷先)의 순절회문(殉節回文)을 송희선(宋熙善) 임대규(林大奎)와 함께 작성하였다.
양덕문(梁德文)
양덕문은 해군에 입대하여 해군 대령을 지냈다.
오덕룡(吳德龍)
오덕룡은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 출신으로 육군에 입대하여 육군 대령이 되었다.
윤경의(尹敬儀)
윤경의는 파평 윤씨로 부평 계양면 오류리 출신이다. 한학자이며 덕망이 높아 성균관 박사(成均館 博士)를 지내고 부평향교 전교(典校)를 역임했다.
지사 이 담(李 潭)
이 담은 부천 계양면 출신으로 기미년 3월 24일 만세운동 때 심혁성 이은선 이공우 등과 함께 황어장날 대한독립만세 시위를 지휘하다가 체포되어 3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충신 이 의(李 倚)
이 의는 부평 이씨(富平 李氏) 명문가에서 태어나 고려 말엽에 벼슬을 한사람이다. 그런데 이성계(李成桂)가 새 나라를 세우고(1392) 고려국이 멸망하자 이 의는 고려의 한 신하로서 감히 다른 나라를 받들 수 없다는 충신불사이군의 절개를 지켜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다. 이 두문동 72인 가운데 인천 출신으로 인천 채씨인 채귀하(蔡貴河)와 인천 이씨인 이 약(李 ·) 두 사람이 있었고 부평사람으로는 부평 이씨 이 의 한 사람이었다. 이 태조는 이 의를 불러 그 학식과 덕망을 아껴 새 왕조에서 벼슬할 것을 권하였으나 끝내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태조는 이 의의 가산을 몰수하고 자연도(紫燕島:영종도)로 귀양을 보냈다. 이 의는 영종도에서 고려에 충절을 지키며 일생을 마치었다. 그의 고고한 절개를 본받아 부평 이씨 문중에서는 충신과 효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현재 용현동(龍峴洞)은 옛 이름이 ·비레이·라 불렸으며 이 곳에 부평 이씨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들이 바로 고려 충신 이 이의 후손들이라고 전한다.
이경응(李敬應)
이경응은 김포 대곶면(大串面) 출신이다. 계양면 면서기로 재임 중 기미년 만세사건 당시 대중의 시위를 밀고하였다고 오해받기도 한 그는 부천교육부 서기 부평학교 교원을 지내고 그 후 서곶 면장 부천군 교육위원
등을 역임했다.
지사 이공우(李公雨)
이공우는 계양면 사람으로 기미년 3월 24일 계양면 황어장터에서 심혁성과 함께 만세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기옥(李基玉)
이기옥은 전주 이씨로 부천군 계양면 다남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교원으로 출발하여 중학교 교장을 지내고 국정교과서인쇄소 사장 및 홍인문화인쇄소 사장(弘人文化印刷所社長)을 지냈다.
충신 이대성(李大成)
이대성은 전주 이씨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예이고 영신군(永信君)의 손자이다. 자는 경백(景伯)으로 중종 14년(1529)에 부평고을 가현(佳峴:작전동)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자는 명원(明原)이다. 왕족 명문출신인 그는 일찍이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는 왜적과 대치하였는데 왜군 두목은 이대성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그는 왜군들에게 호통을 치면서 ·이 오랑캐 놈들아 왜 남의 나라를 침략하느냐· 하고 대항하니 왜군들은 그를 즉석에서 살해했다고 한다. 훗날 나라에서는 그의 충정을 전해 듣고 벼슬을 높여 참의로 추증하였고 충절의 정려(旌閭)를 내렸다. 지금도 그 후손들이 효성동 및 갈산동에 많이 살고 있으며 그의 묘는 양주군 장흥면(長興面)에 부친의 묘와 함께 있다.
충신 이예수(李禮壽)
이예수는 부평고을 사람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남포현감(藍浦縣監)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진주성(晋州城)이 위급하게 되므로 의병을 일으켜 인솔하여 달려가보니 성은 이미 함락된 뒤라 시체가 산더미 같은데 뛰어들어 많은 왜적을 사살하였다. 그 때 엄지손가락이 부상을 당하자 왼손으로 활을 당겨 적을 무찔렀는데 적이 물밀 듯 밀어닥치는 바람에 중과부적으로 적의 흉탄에 맞아 전사하였고 왜란이 평정된 뒤 선조는 그의 전공(戰功)을 높이 찬양하여 벼슬을 올려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추증 하였고 충신의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지사 이은선(李殷先)
이은선은 부천군 계양면 사람으로 기미년(1919) 3월 24일 계양면 황어장터(場基洞)에서 심혁성과 함께 만세시위 중 선두에서 지휘하다 인천경찰서 부내지서(桂山洞) 순사의 칼에 맞아 순절하였다.
황의영(黃義永)
황의영은 부천군 계양면 목상리 출신이다. 대학을 나와 철학박사가 되어 국내에서 명성이 높았다. 지금은 미국에 이민하였다.
황하청(黃河淸)
황하청은 부천군 계양면 박촌리 출신이다. 군에 입대하여 육군대령을 예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