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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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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역사

  1. 문화와 역사

민속

송윤과 부평향교
송 윤(宋 玧)의 자는 영중(榮仲)이요 진천 송씨이다. 송 윤은 선조 36년(1630)에 한양에서 태어났는데 벼슬을 하다가 부평 간재울에 낙향하여 살았다고 한다. 송 윤은 유교사상이 철저하여 향리에서 유림들을 지도 하였으므로 이름이 났다. 송 윤은 34세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는데 송 윤은 그때 부평문묘(富平文廟)에서 유생들을 가르쳤었다.

청군(淸軍)이 강화를 침공하고 남한산성으로 집결하고자 부평을 통과하면서 부평부청사와 부평향교(富平鄕校)에 불을 질렀다. 향교가 불에 활활 타오를 때 송윤은 생명을 무릅쓰고 향교 대성전에 뛰어들어가 공자 및 열성위의 위패를 거두어 나왔다. 그는 위패들을 계양산 서쪽 경명현(景明峴)을 넘어 바위틈속에 숨겨 놓았다가 병자호란이 끝난 뒤 시국이 안정되자 타버린 향교재건운동을 벌여 향교를 복원시켰다.
유림들은 송 윤의 숭유(崇儒)정신을 높이 받들어 유림의 대표로 하였고 그 후 송윤은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부총관(嘉善大夫同知中樞 府使 兼 五衛都總府副總管) 벼슬에 이르렀는데, 그는 장수를 누리고 80세를 일기로 1693년 11월 26일에 별세하였다.

아직도 계양산 아래에 공자의 위패를 모셨던 곳을 공자지벌(孔子之原)이라고 한다. 또한 유림명부(청금록)에 그의 이름이 제1호로 등제되어 있어 향교에 대한 그의 공적을 입증해주고 있다.
계양산 장사굴
계양산 상봉 남쪽 중턱에 굴 하나가 있다. 굴 입구는 비좁아 사람이 기어들어 가야만 되고 안으로 들어가면 5~6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이 굴 안에서 촛불을 켜놓고 기도한 흔적이 남아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이 굴에 대하여 세가지 전설이 있는데, 첫 번째는 옛날 이 굴에서 장사가 났는데 어찌나 힘이 세고 컸는지 그 장사(壯士)는 그 굴에서 나와 남쪽으로 걸어가 영성산(靈城山) 기슭을 지날 때 넓적한 바위를 밟고 지나갔었다고 하는데 발자국이 그 바위에 패여 남아있다고 전해지며, 두 번째로 옛날 임진왜란때 왜군이 부평 땅에 침입하여 부평향교에 불을 지를 염려가 있어 유생들이 향교에 있는 공자를 위시해 여려 명현들의 위판을 이 장수굴에 안치하였다가 난이 평정된 뒤에 다시 봉안하였다. 인근 향교는 모두 불에 타니 훗날 이를 표본으로 삼고 다시 제작하여 갔다고 하며 그 위판을 장사굴에 보존한 교생(校生) 박무영(朴茂榮), 박대충(朴大忠), 이언복(李彦馥) 등 세 사람에게는 숭유정신(崇儒精神)의 귀감이 된다하여 참봉 벼슬을 내리고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고 한다. 세 번째로는 계산동에 사는 도술 철학자인 박거사(朴居士)가 굴에서 도통(道通)하기 위해 장기간 수도한 곳이라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일제시대에 입구가 폭파되어 붕괴되었으며 자갈 무더기가 널려있다.
아남산 부싯돌
조선 말인 고종 17년(1880) 서양에서 성냥이 들어오기 이전에는 불을 피울 때 부싯돌(点火石)을 사용하였다. 이 부싯돌은 가정에서는 물론 개개인의 필수품으로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불을 붙일 때는 넓적한 쇠판에다 깃(불이 잘 당기는 풀)을 대고 부싯돌을 부딪치면 불이 깃에 당겨 불이 일어나도록 했다.

부싯돌로 아남산(阿南山:桂陽山)에서 생산된 돌이 불이 잘 일어나 이를 많이 사용했다. 그래서 계양산 주변사람들은 농사를 다 짓고 나면 부업으로 이 돌을 캐어 짊어지고 한양(서울) 장안을 돌면서 ‘부싯돌 사려’ ‘아남산 부싯돌 사려’하고 외치며 돌을 팔았다. 후에 알고 보니 부평 인천 바닷가의 돌이 더 품질이 좋아 이것으로 대용하였다고 전한다.
계양산과 12사찰
계양산은 한서(한강서쪽) 지방의 주산(主山)이다. 여러 산을 거느리고 있어 산군대(山郡帶)를 이루었다. 전해지기를 계양산(桂揚山)에는 12개의 절이 있었다고 전하여지는데 그 절터를 살펴보면 남쪽인 부평읍쪽에 2개소, 동쪽 계양지구에 1개소, 북쪽 계양방면에 6개소, 서쪽인 서곶 방면에 3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여기 저기 절터로 보이는 곳이 발견되고 있기도 하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및 『부평읍지』등에는 계양산 서쪽에 만일사(萬日寺) 북쪽에 명월사(明月寺)가 있었음이 표시되어 있다. 이 절 이외에 조선 중기 때 절이 너무 많아 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된 이외의 절은 모두 왕명으로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을 쓸 때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은 근대에 지어진 지선사, 성불사, 덕흥사 백룡사등이 계양산을 중심으로 남쪽과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과거길에 뱀을 활로 쏜 류 장사의 비극
부평읍 심일(深逸)마을 류(柳)씨 문중에서 기골이 장대한 청년 장사(壯士)가 있었다. 모두가 그를 보고 류장사라 불렀다. 그는 청운의 꿈을 품고 무예를 열심히 연마하여 자신감을 가지고 무과시험을 보기 위해 큰 활을 메고 한양 땅으로 떠났다. 그가 한다리를 건너가고 있을 때였다. 난데없이 큰 뱀 한 마리가 나타나서 앞을 막아서는 것이었다. 그는 재빨리 활시위를 당겨 구렁이를 쏘았는데 그 뱀은 몸에 화살이 꽂힌채 유유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의외로 과거 길에 괴이한 일을 당한 것이었다. 잠시 후 생각하기를 과거 길에 뱀을 쏘다니 하고 불길함을 느꼈다. 서울 장안에 당도하여 무과시험에 응시하였으나 웬일인지 자기 재주를 발휘하지 못해 여지없이 낙방하였다. 실의에 빠져 집에 돌아온 류 장사는 자나깨나 과거 길에 뱀을 쏜 일은 경망한 행동이라 자책해왔는데, 십여 일 후에 일이었다. 그는 뱀을 쏜 다리에 가 보았다. 그런데 화살이 꽂힌 구렁이가 나타나 자기를 따라 도는 것이다. 그 구렁이의 등에 박힌 화살을 빼주려고 하니 구렁이 아닌가? 어느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허탈에 빠진 그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이게 웬일인가· 류 장사의 눈앞에 기이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방이나 마당이나 장독대, 부엌 등에 온통 화살이 박힌 구렁이 투성이었다. 그는 정신을 잃고 실성한 사람이 된 것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도두리 황무지를 개척한 박 감찰
부평읍(계산동)에는 한말에 벼슬한 박 감찰(朴 監察)이 살았다. 그의 본명은 박종오(朴鍾吾)이고 밀양 박씨이다. 박 감찰은 욕심이 많아 항상 생각하기를 무엇을 해서 부자가 될까하고 궁리한 나머지 부평평야의 습지인 황무지를 개척하기로 하고 지금의 서운동 넓은 들에 거점을 잡고 우선 개간하기 쉬운 곳에 말뚝을 박고 표시를 한 다음 인근 사람과 김포 등지에서 사람을 모집해서 개간을 시작하였다. 그 시기가 한일합방 직전인 1910년으로 작인(作人)들을 이주시켜 우선 둑을 막아 논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제일 먼저 이주한 사람이 과거 친분이 있던 김포 검단면 여래리의 임덕상(林德相)이었다. 박 감찰(박 주사)은 임덕상의 협조를 받아 방죽을 막고 개간을 해서 논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허술하게 막은 제방은 7월 장마에 한강이 범람하여 자주 터져 3년에 한번 추수하기가 어려우니 작인들은 살수가 없어 농토를 버리고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박 주사는 좌절하지 않고 끈질기게 힘을 기울여 방수제방을 더욱 튼튼하게 수축하여 방죽안 농토가 50여 정봉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임덕상의 연줄로 검단의 박성회, 조백증, 조인수, 이화춘, 임병상, 임병태 등이 이사를 와서 1912년에는 모두 8가구가 살았다. 박종오가 이와 같은 개간사업을 시작한 것은 외아들 박용직(朴容直)을 정착시키고져 함이었으나 용직은 농사에는 뜻이 없고 연예계에 몸을 담아 방랑생활을 하니 박 주사는 이 땅을 인천의 갑부 장래형에게 넘기고 손을 떼었다. 이 때 땅관리자로 장석윤(張錫胤)이 상주하였다. 방죽도 매년 수축을 하고 농토도 개간하여 재미를 보았는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를 만나 싹 쓸어버리니 농토도 가대도 모두 폐허가 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일본인 하시다에게 헐값에 팔아 교전농장이 되어 방죽을 더욱 튼튼히 막고 신식 농기구를 들여다 방죽안 모두를 개간하여 180정보를 이룩하고 부평수리조합이 양 배수를 잘하여 옥토를 만들어 한 10년간 지속하다가 1934년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서울의 갑부 김한규(金漢奎)가 교전농장 전부를 인수하여 김보합명회사 농장(가족농장)을 만들고 인근의 차치농장(삼산동) 등을 인수하여 250정보의 대농장을 경영하다가 해방 후 토지개혁으로 땅이 모두 농민들에게 분배되고 말았다.

1910년부터 무지공처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니 마을 이름을 만들 때 부평읍(계산동)의 안산격인 망동산 줄기가 동쪽으로 흘러내려 이 마을에 와서 동산을 이루니 동두(東頭)머리라 했던 것이 도두머리로 변했는데 여기다 한자를 붙일 때 도두리(道頭里)가 되었다.
큰 장사가 난 까칫말
까칫말(까치마을)은 지금의 작전동 작정마을(鵲井村)을 말한다. 작정(鵲井)이란 까치우물을 뜻하는데 작정 마을에 한 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물 주위에는 나무가 무성해서 까치가 많이 모여들어 동네 이름을 작정리라 불렀다. 옛날부터 전해 오기를 이 물을 먹으면 장사가 난다는 것이다. 근세에 이르러 광산 김씨(光山 金氏)중에서 한 장사가 나왔는데 그는 청년시절 타작마당에 갈 때면 매통(탈곡할 때 사용하던 나무 통) 대신에 수백 근 되는 암석을 굴리고 다니며 타작을 하였다고 한다.

훗날 그 장사는 감찰벼슬을 해 김 감찰이라 불리었다. 그 후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에 떠돌이 중이 이 우물에 빠져죽어 이 우물은 폐지되고 말았으며 또한 장사도 안 나온다고 전한다.
황어향과 노어지 마을
황어향(黃魚鄕)의 황어란 누런 잉어를 뜻하는 것으로 옛날에는 이 고장이 한강변에 위치해 있어 여름 홍수때가 되면 한강물이 흘러 넘쳐 잉어 산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그래서 고려 초에는 황어현(黃魚縣)이 있었던 곳으로 향(鄕)이란 큰 고을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계양지방에는 노오지리(老吾地里)란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마을이 선주지(仙住池)로 편입되어 이름까지 소멸된 것이다. 그런데 노어지(老魚地)의 잘못된 표기로서 이 마을에는 큰 웅덩이인 못(池)이 있었다고 한다. 이 연못에 늙은 잉어(老魚)가 많이 있어 노어지(老魚地)라 불렸던 것인데 마을 이름을 한문으로 표기할 때 뜻을 잘 모르고 노오지(老吾地)로 했다는 것이다.
섬같은 독갑산 감옥터
독갑산(獨甲山)은 역굴(驛洞:多男洞) 새말 앞 벌판에 바가지를 엎어놓은 형국의 외따로 있는 작은 동산인데 고려 초 수주(樹州) 때 죄인을 수용하던 곳이라 한다. 산 주위를 파서 물이 고여 마치 섬과 같이 만들고 출입구에는 다리를 놓고 동산 전체가 감옥으로 죄인을 수용하였다고 한다.
선주지의 용마정
계양구 선주지(仙主地) 마을은 옛날 김해 김씨(金海 金氏)의 원주지라 전해온다. 이 마을 기슭에는 김씨들의 묘역이 있는데 자손들은 없고 여러개의 비석만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다. 옛날 이 김씨 집에 시집온 한 부인이 장사아기를 낳았다. 그 때에는 장사가 나면 나라에 반역할 것이 두렵고 그로 인하여 부모가 벌을 받게 될까 무서워 장사아기를 죽여버리는 예가 많았다. 이 장사아기의 부모도 후환이 두려워 장사아기를 죽이려 하다가 차일피일하고 있었는데 아기장사가 걷기 시작하더니 앞산인 독갑산(獨甲山)을 지나 계양산으로 도망쳤는데 이 때 용마정(龍馬井) 우물에서 용마가 나타나 이 장사아기를 태우고 어디론가 달아났다고 전한다. 독갑산에는 아기장사의 발자국과 손자국이 남아있다고 전해지기는 하나 그 사실을 알 수는 없다.
부평 매방과 충렬왕의 매사냥
이 습(李 褶)은 고려와 고종 후궁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자신이 국혼한 자라 칭하고 원종의 총애를 받아 많은 영화를 누렸는데 상서우승(尙書右承)이 되고 충렬왕(忠烈王) 때에는 지어사상장군(知御史上將軍)을 역임한 간신이다.

고려시대에는 총이 없어 매사냥이 성행하였는데, 송도 한복판에 매방이 있었으나 민가의 닭과 개를 함부로 잡아 죽이는 터에 이런 일로 큰 비난을 받았다. 이 때 이 습은 부하 박 향(朴 鄕)을 시켜 도성 안에 있는 매방을 다른곳에 옮길 것을 지시하여 여러 곳의 후보지를 탐색한 결과 부평땅 경명현(景明峴) 부근이 적지라서 사육도가(飼育都家) 윤 수(尹 秀)로 하게하여 매방을 이전하여 매를 사육하였다.

문헌에 보면 충렬왕은 왕자시절 원나라에 볼모로 가서 매사냥을 배웠고 아주 즐겨했다고 하며 부평 매방에도 몇 차례 왕래한 기록이 나온다. 한번은 원나라 사신 달로화치와 더불어 많은 수행원을 대동하고 이곳 부평땅에 와서 매사냥을 하며 즐겼는데, 이 때 이습은 왕을 즐겁게 해주려고 윤 수를 시켜 미리 고니와 따오기 등의 배와 등털을 뽑아서 높이 날게 하고 매를 시켜 이를 잡아오니 왕은 이를 보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그래서 충렬왕은 이 습을 총애하고 높은 벼슬을 내려주었으며 또한 부평골의 등급을 높여 길주(吉州)라 하고 자기가 죽으면 이 땅에 나를 묻어 달라고까지 하였으나 아들은 이를 반대하고 다른 곳에 능을 썼다.